[야구는 구라다] 추신수의 쎈 척, 그 의미는

조회수 2018. 7. 9. 11:3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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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게티 이미지

다른 사람도 아니다. 적어도 그는 그러면 안됐다. 커크 깁슨 말이다.

어제(한국시간 8일) 경기였다. 1회, 첫 번째 공에서 일이 생겼다. 원정 팀 1번 타자의 큼직한 2루타가 터진 것이다. Fox Sports 중계진은 시작부터 데시벨을 올린다.

캐스터 : 아, 해머가 작렬했습니다. 멀리 갑니다. 멀리…. 담을 맞고 튀어나오네요. 중견수가 잡을 수 없어요. 한참을 굴러나오네요. Choo 2루에서 멈춥니다. 아주 큰 2루타예요. 그는 어제도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죠. 오늘은 베이스 2개짜리로 시작하네요. 아픈 선수 맞나요?

해설자 : 이건 3루까지 갔어야죠. 아마도 홈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달리는 게 아니라) 조깅을 했네요.

캐스터 : 3루타가 충분했다는 말씀이군요.

해설자 : 그럼요. 타구가 스타디움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거죠.

캐스터 : 그렇네요. 공이 많이 굴렀어요. 중견수 존스도 당연한 3루타라고 여긴 것 같아요.

이들은 홈 팀 타이거스 위주로 방송하는 Fox Sports 디트로이트의 중계진이다. 캐스터는 마리오 임펨바, 해설자가 유명한 커크 깁슨이다.

깁슨은 2014년 D백스 감독을 끝으로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에서 방송인의 삶을 살고 있다. 타이거스는 그가 전성기(1979~1987)를 보낸 곳이다. 1984년에는 월드시리즈 반지도 안겨줬다. 격정적인 외야수였던 그는 30-30도 한 차례 달성할만큼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유명했다.

하지만 인생 하이라이트 장면은 LA로 이사한 뒤였다.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왼쪽은 햄스트링, 오른쪽은 무릎 타박상으로 제대로 걷기도 힘든 환자였다. 벤치를 지키던 그는 9회 말 대타로 등장해 극적인 역전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다. 4만개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절뚝절뚝 베이스를 도는 장면은 MLB 역사상 최고의 한 컷으로 꼽힌다.

그런 그가 ‘조깅’ 드립을 날리다니. 일주일전부터 MRI 찍었다는 사실도 이미 전해졌다. 시리즈 첫 날에도 결장했다. 이튿날에도 내내 제대로 뛰지 못했다. 지명 타자로만 나오고 있는 것 봐도 모르나? 이건 사전 취재가 전혀 없었다는 말 밖에 안된다.

게다가 문제의 그 2루타가 원정 팀의 클럽 (타이) 레코드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다음 타석이 돼서야 간단한 안내 멘트가 나갔다. 아무리 원정 팀이지만,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Fox Sports 디트로이트>으 중계진. 오른쪽이 해설자 커크 깁슨이다. mlb.tv 화면

애매한 타구에 공식 기록원은 ‘실책’ 판정

신기록의 날이 밝았다. 코메리카 파크는 화씨 80도(섭씨 27도)의 화창한 날씨였다. 문제는 상대 선발이다. 마이클 풀머. 90마일 후반대를 던지는 파이어 볼러다. 인상도 별로다. 험상궂다. 그래서 그런 지 상대 전적도 영 안 좋다. 7번 만나서 안타는 커녕 한번도 진루권을 얻어내지 못했다. 께름칙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타석은 체인지업에 말렸다. 휘어져 나가는 90마일짜리를 얼떨결에 쫓아갔다. 빗맞은 타구는 2루수의 먹잇감이 됐다. 느낌이 안 좋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타자들이 잘 친다는 점이다. 덕분에 차례가 빨리빨리 돌아왔다. 2회에 벌써 두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볼넷과 안타 2개, 번트가 이어졌다. 1사 1, 2루에서 타석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실랑이가 있었다. 카운트 2-2가 됐다. 5구째. 승부구는 역시 체인지업이었다. 떨어지는 공에 컨택은 성공했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땅볼이었다.

어랏? 잘못하면 병살이겠는데? 아픈 다리가 떠올랐다. 어정쩡하게 맞은 타구에 1루수가 미트(글러브)를 내밀었다. 그런데 잡지 못했다. 공은 그대로 우익수 쪽으로 빠져나갔다. 2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계속된 1사 1, 2루가 이어졌다.

기록은 뭘까? 비상한 관심이 공식 기록원에게 쏠렸다. 실책, E(error)라는 기록이 발표됐다.

많이 아쉽다. 뭘 그리 깐깐한가. 갑자기 팔이 안으로 굽는다. 국뽕의 기운이 넘쳐난다. 맹렬한 반론이 피어오른다.

타구가 평범하지 않았다. 발자국이 많은 곳에서 튀면서, 살짝 가라앉고 말았다. 일종의 불규칙 바운드였던 셈이다. 물론 1루수(존 힉스)는 어설펐다. 본래 위치도 포수다. 혹시나 그런 선입견이 기록원의 판단을 흐리지 않았을까? 그래도 동의하기 어렵다. ‘애매할 경우에는 공격측에 유리하게.’ 야구 기록의 대원칙 아닌가.

어떤 리그에서는 사소한 일에 기록실 문짝이 박살나기도 했다. 하물며 대기록이 걸린 일이다. 구단 측에서 어필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기록원이 스스로 번복하는 경우도 기대해본다.

당사자는 어떨까. 눈치를 살폈지만 별 반응없다. ‘좀 쎈데?’ 하긴 뭐. 앞으로 기회는 충분하다. 아직 2회다.

                                                               사진 제공 = 게티 이미지

기적 같이 찾아온 9회 마지막 타석

차라리 실책 때는 괜찮았다. 쿨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네번째 타석이 치명적이었다. 7회 1사 1루였다. 지긋지긋한 풀머는 여전히 마운드에 버티고 있다. 도전자는 점점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 세 번의 대결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담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초구부터 방망이가 돌아간다. 이번에도 체인지업이었다. 풀머의 고집도 어지간하다. 88마일짜리가 외곽으로 도망가려다가 배트에 걸렸다. 이번에는 타이밍이 괜찮다. 강한 라인드라이브성이 우측으로 뻗어갔다. 그런데 아뿔사. 정면이었다. 2루수가 잡아 4-6-3으로 연결시켰다. 제대로 뛰지 못하는 타자 아닌가. 손쉬운 병살 플레이가 연출됐다.

허무한 7회가 끝났다. 그 때였다.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쎄~한 느낌이 엄습한다. 남은 공격 기회는 두 번이다. 최소한 4타자 이상이 살아나가야 한다. 그래야 5번째 타석이 돌아온다.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광진의 <편지>가 떠오른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

그런데 웬 일인가. 스멀스멀. 다큐멘터리는 갑자기 드라마로 장르가 바뀐다. 8회 초. 원정 팀의 공격에서 3명의 타자가 살아나갔다. 점수도 못 내면서 순번만 진행시켰다. 마치 팀 동료 한 명을 위해서 말이다.

9회 마지막 공격은 7번부터 시작이다. 1사 후. 8번 로날드 구즈만의 빗맞은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진다. 덕아웃에서 숨 죽이던 챌린저가 드디어 칼을 뽑았다. 대기 타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진땀나고, 초조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차례를 기다리던 기록의 주인공? 아니다. 실제 타석에 있던 9번 타자 카를로스 토치일 것이다. <…구라다>는 거기에 500원 건다. 모두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마련해 놓은 기회다. 자칫 병살타라도 쳐서 날려버리면? 그냥 이닝이 끝이다. 클럽하우스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가. 토치는 초인적인 참을성을 발휘했다. 상대 투수의 공 3개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3구 삼진. 혼자 죽기를 시전했다. 드디어 드라마가 시작된 것이다.

  극적인 안타로 연속 기록이 이어지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동료들.    mlb.tv 화면

기록의 과정에서 보여준 세련됨, 성숙함

아시다시피. 여기서 가장 극적인 타구가 만들어졌다. 데굴데굴. 완전히 빗맞아서 힘없이 구르는…. 3루수가 잡았지만 도저히 어쩌지 못할 정도로 행운이 깃든 샷이었다. 자신의 말처럼 ‘신이 준 것 같은’ 극적인 안타였다. 아픈 다리도 언제 그랬냐 싶었다. 거짓말처럼 단거리 전력 질주가 먼지를 일으켰다. 덕분에 25년 된 프랜차이즈 역사 하나는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됐다.

기록 자체도 대단했다. 탄생 과정은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때문에 모든 흥행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수작이었다. 하지만 <…구라다>가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주인공이 보여준 과정의 ‘세련됨’ 또는 ‘성숙함’이다.

사실 믿지 않았다. 최근 인터뷰 때 그를 향한 단골 질문, 그리고 답변 말이다. 대답은 늘 뻔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1번 타자로써 출루를 많이 해서 팀에 도움되는 게 먼저다.” 재미 없었다. 흔한 모범 답안이었다. 그런 식상함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에이, 구라 치시네.’

수많은 미디어들이 매일 귀찮게 묻는다. 방송 때마다 그래픽 잔치가 벌어진다. 중계 카메라는 걸핏하면 원 샷이다. 그런 집중적인 관심 속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니. 그런 말을 누가 믿겠나. 밤에 꿈자리도 온전치 못 할 것이다. 잠인들 제대로 오겠나. 타석 하나 하나에 전신의 감각이 곤두설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오늘(한국시간 9일) 그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물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다. 그러나 그 압박감과 절박함을 이겨내는 방식은 한번 음미해 볼만하다.

일단 생각치 못했던 기회가 돌아오자 빙긋이 웃는다. 그리고 차분하게 타석을 준비한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이윽고 맥없는 삼진으로 철수하는 앞 타자(토치)에게 스치듯 격려의 한마디를 건넨다. 2사 1루의 타석. 승부에 앞서 포수 제임스 맥 캔이 말을 건다. 아마 ‘46, 47’ 같은 숫자에 대한 것이리라. 신경전인가? 개의치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고 세련됐다. 뭐, 여느 때의 흔한 장면이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부분이 있다. 단호하고 공격적인 자세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간이 떨려서 스윙이라도 제대로 하겠나. 어찌어찌, 볼이나 잘 골라서 공짜 베이스 하나 얻어볼 요량이 머리 속에 가득할 것이다. 혹시 아나 몸쪽에 하나 스치면 “땡큐 베리 머치“다. 그런데 그는 다르다. 특히 마지막 그 타석은 놀라웠다. 카운트 0-1에서 2구째에 가차없이 휘둘렀다. 아무리 적극적이라도 그렇지, 이게 심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도전자는 이날 5번의 타석을 맞았다. 그 중 길게 끈 것은 딱 한번 뿐이다. 2회 두번째 타석이 5구째(2-2)까지 갔다. 나머지는 모두 3구 이내에 끝냈다. 특히 4회와 7회는 초구를 공격했다.

                                                                     사진 제공 = 게티 이미지

팀이 갖는 피로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연속’이라는 테마가 걸린 기록은 사실 피로감을 동반한다. 도전자 자신도 그렇다. 게다가 팀도 희생해야 하는 부분이 생긴다. 이를테면 함부로 교체하지도 못하고, 게임 플랜도 크게 어긋나기 힘들다. 스트레스 받는 주인공 눈치 보느라 주변 사람들도 피곤할 것이다. 여기에 당사자의 집착이 보태지면 피로감은 배가되기 마련이다.

그는 아마 이런 점을 마음에 뒀으리라. 그래서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을 것이다. 일부러 쿨하게 강조할 것이다. ‘난 괜찮다. 우린 그냥 이기기 위한 게임을 하면 된다.’ 그런 메시지일 것이다 .

그런 점에서 이번 기록은 특별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긴 뭐. 욕 먹고, 삐딱한 시선을 이겨낸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어쩌면 그런 멘탈의 단련이 이날의 기록을 도왔을 지도 모르겠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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