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 코리안리포트]캐나다 거포 로맥의 야구와 인생

조회수 2018. 6. 20. 13: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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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에 프로 데뷔해 20팀을 거쳐 SK 와이번스에 정착한 제이미 로맥의 여정과 새로운 시작

작년에 제이미 로맥은 미국과 한국을 합쳐 42홈런을 쳤습니다.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뜨거운 초반 기세에 이어 중반 기복을 겪기도 했지만 성공적인 첫 시즌을 마쳤습니다. 올해도 SK 홈런 타선의 핵심 멤버로 뜨거운 방망이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료 최정(25홈런)에 이어 홈런 공동 2위(23개, 두산 김재환과 타이)입니다. 최근 편도선염으로 잠시 주춤하지만 홈런 파워는 여전히 가동되고 있습니다. 캐다나 작은 도시 런던에서 온 로맥의 이야기입니다.


거포인 로맥은 야구 이야기를 할 때는 놀러운 기억력으로 아주 세세하고 꼼꼼하게 인터뷰를 이어갔습니다.


- 제이미 로버트 로맥이 풀네임이다. 제이미는 애칭인가? 성도 특이하다.

▶ 원래 이름은 제임스(James)인데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제이미(Jamie)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가 그게 그냥 이름처럼 됐다. 워맥은 우크라이나 계통의 이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우크라이나 후손이지만 캐나다에 산 것은 7대째인가 그렇다.


- 그런데 고향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 런던이다. 영국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곳인가 싶었다.

▶ 그런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심지어는 런던 출신인데 왜 영국식 영어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웃음)


- 처음 야구를 한 게 언제인가?

▶ 4세 때 티볼을 처음 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내가 처음부터 야구에 푹 빠졌고 아주 잘 했었다고 한다. 7세 때부터는 아이스하키도 했고, 하키도 아주 재밌게 했지만 야구처럼 빠지지는 않았다. 야구와 하키 모두 지역에서 연령별 최고 수준의 팀에서 뛰었는데, 심각하게 미래를 결정해야 했을 때 난 주저 없이 야구를 선택했다. 내가 살던 곳은 위대한 하키 선수를 많이 배출한 하키 타운이었지만 내겐 야구가 최고였다.

어머니 얘기로는 아주 어려서도 야구 경기를 지거나 형편없는 경기를 하고나면 집에 가는 차에서 말도 안 하고 분을 삼키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야구에 사랑에 빠졌다.


- 가족 중에 함께 야구를 한 형제가 있나? 아버지와 함께 했나?

▶ 14세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은 나이 차이가 꽤 났다. 그렇지만 같은 동네 바로 곁에 두 명의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고, 유치원 때부터 야구와 하키를 함께 하며 자랐다. 지금도 가장 친구들인데 그 둘은 프로하키 선수가 됐다. 동생은 그 친구들의 동생들과 같은 또래라 함께 운동을 하며 자랐다.

여동생 데븐은 뛰어난 축구 선수였다. 플로리다의 대학에 전액장학금으로 진학해 각종 학교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막내 웨스도 운동을 꽤 잘 했지만 아버지처럼 엔지니어가 됐다. 지금 제일 잘 나간다. (웃음)


아, 외할아버지는 하키 선수셨고, 2차 대전에 참전했을 때도 캐나다군 하키 팀에서 뛰셨다. 제대 후 NHL의 디트로이트 레드윙스가 계약했을 정도로 잘 하셨다고 들었다. 내가 마이너리그에서 뛸 때 갑자기 관중석에 불쑥 나타나셔서 나를 응원하시기도 했다. 외할아버지 조지는 당시 85세쯤 되셨는데 캐나다부터 직접 10시간 넘게 운전해서 내 경기를 보러 오셨다. 경기장에 들어가며 주차장을 살피다가 할아버지 차를 발견할 때가 있었다. 2,3일씩 머물며 내 경기를 보고 가시곤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외할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이 남았다.


- 고교 시절 야구와 하키 팀에서 뛰었겠다.

▶ 학교 하키 팀에서 뛰었지만 야구팀은 없었다. 대신 런던 시 야구팀에서 뛰었다. 시를 대표해 뛰면서 다른 도시 팀과 경기를 했다.


- 언제부터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건가?

▶ 어머니 얘기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미래의 꿈 등에 대한 숙제 등을 할 때면 항상 프로야구선수가 될 것이라고 했었다니 아주 어려서부터 꿈이었던 모양이다. (웃음) 15세 정도부터 스카우트들이 나를 보러 오면서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한 번 마음을 먹으면 포기하지 않는 편이다. 얼마나 오래 걸리든 언제가 되든지 꼭 그것을 이루려고 모든 것을 건다. 그때 이후 프로야구선수로 꼭 자리를 잡는다는 목표를 포기한 적은 없다.

2015년 SK 스카우트와 처음 만났을 때도 만약 KBO리그에서 뛰게 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야구와 문화 적응 등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최선의 노력으로 반드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 2003년 드래프트에서 애틀랜타가 뽑았는데 어느 정도 예상을 했는지.

▶ 스카우트들이 많이 보러 왔었고 당시 17세이던 나는 ‘그저 뽑아만 주면 무조건 열심히 할 것이다. 돈도 필요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웃음) 그런데 캐나다 작은 도시 선수가 4라운드에 뽑히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스카우트들이 3라운드에서 7라운드 사이에 뽑힐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기대는 했지만 정작 4라운드에 뽑혀서 깜짝 놀랐다.


- 드래프트를 TV로 봤나? 뽑혔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 당시 캐나다에서는 MLB 드래프트를 중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 친구들이 모두 모여 인터넷 방송을 들으며 기다렸다. 미국 유명한 야구 학교 선수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들으면서 사실 불안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작은 도시 출신 고교 선수를 과연 뽑을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내 이름이 불렸고, 모두가 난리가 났다. 나 역시 기대는 했었지만 정작 뽑히니 믿을 수가 없었다. 끝내기 홈런은 기대는 늘 하지만 정착 쳤을 때 믿기 어려운 그런 심정이랄까.

지역 TV 방송에서 나와 인터뷰도 하고 전화기가 끝없이 울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런던 시 사상 MLB의 가장 높은 라운드에 뽑힌 선수였다. 그 기록은 작년에 깨졌다.


- 계약은 쉽게 진행됐나?

▶ 바로 그날 저녁에 애틀랜타 스카우트가 와서 계약을 했다. 23만 달러의 당시로서는 꽤 괜찮은 계약금도 받았다. 당시 나를 스카우트한 분이 지금은 캔자스시티 스타우트 부장인데 내 결혼식에도 참석했을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낸다.


- 프로 적응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루키리그에서 싱글A로 가는데 3년이 걸렸다. 만 17세에 계약을 했는데 적응이 쉽지 않았나?

▶ 부상이었다. 첫 3년간 기록을 보면 경기 수가 아주 적다. 첫 시즌 15경기인가 뛰고 허리를 다쳤는데 의료진도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2년째에 중반부터 좀 나아지면서 3년차에 들어섰는데 시즌 초 외야에서 다이빙 캐치를 하다가 담장에 부딪혀 손목이 부러져 스크루를 박는 수술을 받았다.

첫 3년간 총 석 달 정도 경기를 뛴 것 같다. 캐나다에서 온 젊은 선수로서 많은 경험을 쌓고 배워야할 시기를 그렇게 보내 정말 힘들고 속상하던 시절이었다. 매년 젊은 선수들이 계속 들어오는데 나는 트레이닝룸에서 치료를 받고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힘겨운 시절이었다.


로맥은 SK 이적 후 작년에 31개, 올해 23개 등 54홈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일 현재 KBO리그 홈런 공동 2위입니다.


- 2007년에 피츠버그로 트레이드된다.

▶ 2006년 처음 풀타임으로 뛰면서 좋은 시즌을 보냈고(108경기 16홈런 68타점, 첫 3년보다 많은 경기를 뛰었다), 가을 인스트럭션 리그에서도 MVP에 뽑혔다. 그런데 당시 애틀랜타와 피츠버그가 트레이드 협상을 하고 있었고, 피츠버그 스카우트들이 가을 리그에 와서 선수들을 점검하고 있었다더라. 애덤 라로시와 마이크 곤살레스 트레이드였는데 피츠버그가 나를 딜에 포함시키길 원했다.


- 피츠버그가 꽤 기대를 했고, 팀 유망주 랭킹 6위까지 올랐는데 빅리그 기회는 없었다.

▶ 트레이드 직후에 프론트 오피스가 전부 바뀌었다.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에 과거에 뽑혔거나 트레이드한 선수들은 다시 트레이드되거나 기회가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2008시즌 나는 팔꿈치 수술을 약간 늦게 팀에 합류했지만 하이 싱글A와 더블A에서 25홈런에 80타점을 올렸다. 다음 해 기대가 컸지만 늘 슬로우 스타터인 내가 초반에 성적이 별로이자 곧바로 다시 싱글A로 내려 보냈다. 굉장히 실망스러웠던 해였고, 시즌이 끝나고 마이너리그 FA로 피츠버그를 떠났다.


- 그리고 캔자스시티와 세인트루이스를 거쳐 LA 다저스에서 빅리그에 데뷔한다.

▶ 캔자스시티에서는 어쩌면 에릭 호스머 같은 젊은 선수들의 맏형 역할을 내게 맡겼던 것 같다. 프로 8년차에 아직 20대 중반이었지만 팀에 프로에 온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유망주들이 아주 많았다. 더블A 팀에는 호스머 외에도 무스타카스, 살바로드 페레스, 대니 더피, 그렉 홀랜드 등이 함께 뛰면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나중에 캔자스시티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팀은 젊은 유망주들에게 집중했고, 나는 빅리그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최승준 등 동료들에게도 공유한다. 최승준은 분명히 리그를 호령할 타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아직 타이밍이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그의 무대가 올 것이니까 늘 준비하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런 각오로 마이너리그를 버텼다. 미국이든 일본이나 한국이든 나의 기회를 반드시 온다고 믿었다. 아직은 최승준의 시간이 아닐 뿐이다.


- 그리고 2014년 다저스로 간다.

▶ 사실 다저스와 계약할 때 빅리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당시 다저스는 빅리그 최고연봉 팀이었고 스타들이 즐비했다. 여러 팀 중에 내게 가장 관심을 보여 계약을 하기는 했지만 일본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보여 나를 그리로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난 트리플A에서 여전히 슬로우 스타트를 끊었는데 5월 들어 상승세를 타면서 1주일에 홈런 7개를 쳤다. 그런데 후안 유리베가 부상이 왔고 나는 당시 3루수로 뛰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역시나 더블A에서 2할 치던 쿠바 출신의 유격수 아루에바레나를 빅리그로 올리더다.

그리고 1주일 후에 칼 크로포드가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는데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난 포기했다. 그러다가 다음날 호텔방으로 아침 8시에 전화가 왔다. 룸메이트가 받았는데 감독님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빅리그로 가라는 전화였다. 꼭 드래프트 된 그 순간 같았다. 늘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정작 소식을 접하니 믿을 수가 없는 그런 심정.


- 프로 생활 11년만이었다. 첫 타석은 대타였는데.(2014년 5월 28일)

▶ 다저스타디움에서 클레이턴 커셔의 대타로 나섰다. 메이저리그 데뷔전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모든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신시내티 호머 베일리가 투수였는데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더라. 내가 누군지도 투수는 몰랐을 테니까. 150km 정도를 던지는 투수였는데 초구에 156km 강속구를 던지더라. 힘껏 받아쳤는데 2루수 필립스 정면으로 갔다. 그렇게 첫 타석이 끝났다.


첫 3일 정도는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인터뷰도 많이 하고 다저스 방송에서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니며 취재를 했다. 사실 첫 날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부터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캐나다 작은 도시 출신의 11년차 프로의 빅리그 데뷔는 관심을 많이 끌었던 모양이다. 분위기에 압도당했고, 대타로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 첫 안타는 선발 출전에서 나왔다.(2014년 6월 8일)

▶ 마침내 선발로 출전하자 모든 게 편했다. 콜로라도 원정이었는데 비오고 흐린 날이었다. 벨라일의 공을 제대로 때렸고 센터필더 중앙 담장을 때렸다. 다른 날이었다면 무조건 홈런 타구였다고 모두 아쉬워했다. 난 그저 잡히지 않기만을 바랐다. (웃음) 그 안타 이후 비가 심해져 6회로 경기가 끝났고 결국 그것이 마지막 타석이 됐다. 신시내티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고향 친구들도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 다음 해 애리조나 트리플A에서 아주 좋았다.(27홈런 100타점)

▶ 일본의 트레이드 데드라인인 7월에 정말 많은 일본팀이 미팅을 원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라쿠텐과는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깨졌다. 실망이 컸는데 8월에 빅리그에 전격 승격됐다. 많지 않은 기회였지만 3할3푼3리를 치고 괜찮았지만 실망도 큰 시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았지만 빅리그 기회는 멀어지고 나이는 만 스물아홉이었다.


- 2016년 일본 요코하마에서의 야구와 삶은 어땠나?

▶ 쉽진 않았다. 초반에만 4번이나 2군을 오갔다. 야구는 오르락내리락이 있다.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바로 2군으로 내려가면 방망이가 살아 오르기 시작했다가 잠시 1군에 올라 주춤하면 다시 2군으로 가서 맹타를 치는 식이었다. 감독님도 그렇고 나를 도와주려는 의도는 분명했지만 2타석 후 다시 2군으로 오가는 것은 참 힘들었다. 나에 대한 기대치를 인식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무조건 파워에만 집중해야 했었다. 2안타치고 볼넷 두 개를 골라도 부족했고, 3K 후에 홈런 하나만 쳐도 좋은 경기였는데 그걸 몰랐다. 내가 적응을 잘하지 못한 셈이다.


- 그러다가 2017시즌이 시작 한 후에 SK로 오게 된다.

▶ 일본에서 실패한 후 좀 절박했었다. 임신한 아내는 출산 휴가를 받은 상태였고, 나는 31세가 됐다. 어느 팀이든, 더블A라도 상관없이 뛰겠다는 각오였는데 의외로 샌디에이고와 밀워키 등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인맥이 참 중요하더라. 샌디에이고가 빅리그 캠프 초대 조건을 내세웠고, 결국 파드리스에서 좋은 스프링 캠프를 보냈다. WBC 캐나다 대표로도 뛰었고.

그렇게 트리플A에서 시즌을 시작했는데 SK에서 연락이 왔다. 그전에 많은 일본, 한국의 오퍼가 깨진 경험이 있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파드리스의 바이아웃 요구 액수도 컸고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협상이 돼 결국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 KBO리그 적응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갈수록 좋아졌고 올 시즌은 시작부터 좋다. 어떤 변화를 겪었나.

▶ 계속해서 한국 야구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4월 트리플A에서 아주 좋았고(10홈런) 한국에 처음 와서도 좋다가 6월 하순부터 고생을 했다. 그리고 마무리를 잘했고, (104경기 31홈런 64타점) 올해는 초반부터 괜찮게 하고 있다. 크게 변한 것 없다고 본다. 올해 초반 좋았지만 또 떨어질 수 있고, 그게 야구다. 그러나 100경기를 넘게 치르면 내가 할 역할을 할 자신이 있다.


한국 생활에 행복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로맥 가족 @SK 와이번스 제공


- 팬들의 질문도 있다. 동료들과는 어떻게 지내나? 외식도 하고 그러나?

▶ 그렇다, 아주 잘 지낸다. 처음에 오자마자 한국의 전통이나 방식이 있는 것을 알지만 나보다 어린 선수들에게 편하게 대해 달라고 했다. 만약 나보다 나이든 선수들과는 예의를 차려야하고, 어린 선수들도 날 어려워하면 난 클럽하우스에서 누구랑 어울리나? (웃음) 그래서 특히 어린 선수들에게 편하게 대해달라고 부탁했다. 금방 모두와 잘 지내게 됐다.


- 로맥아더!

▶ 정말 감사한 별명이지만 너무 과도한 별명이기도 하다. 난 그저 우리 팀의 한 명의 선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들에게 감사드린다.


- 가장 편한 수비 위치는?

▶ 3루도 재밌고 1루수와 우익수도 괜찮다. 야구하면서 참 많은 포지션을 맡았지만 한 시즌에 그렇게 자주 옮겨 다닌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올해는 4번 타자 1루수로 거의 고정으로 나가는데 그것이 큰 도움이 된다.


- 어려서부터 힘이 센나?

▶ 그렇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는데 어려서부터 늘 홈런을 치고 공을 멀리 던지고 그랬다고 한다. (웃음)


- 지금까지 프로에 와 몇 팀에서 뛰었는지 알고 있나. (모든 기록을 꼼꼼히 기억하던 로맥이 여기서는 처음 주춤했습니다.)

▶ (한숨) 그건 정확히 모르겠다.


- 내가 세어보니 SK가 21번째 팀이더라.

▶ 하와이,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등 윈터리그를 모두 합치면 그게 맞을 거다.


- 16년간 그 많은 팀을 옮겨 다녔는데, 이제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다. 프로 데뷔 후 4년만인 2006년 초 싱글A에서 처음으로 건강하게 시즌을 시작했는데 초반에 완전히 헤맸다. 처음으로 많은 관중 앞에 라이트 아래서 야간 경기를 해보는 경험이었는데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자 팀에서 나를 다시 연장캠프로 보냈다.

플로리다의 75번 고속도로를 픽업트럭을 운전해 캠프로 가는데 이정표가 나왔다. 남쪽으로 가면 캠프, 북쪽으로 계속 가면 내 고향 캐나다로 갈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갈등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짧은 찰나였고 곧바로 캠프로 갔다. 1주일간 홈런 5개를 치고 다시 싱글A로 올라갔다.


- 무엇이 당신을 지탱하게 했나?

▶ 만약 내가 빅리그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건 실패라고 늘 생각했다. 나의 신체적인 능력이나 노력이라면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믿었다. 나보다 공을 더 강하게 멀리 치는 선수는 많지 않다고 늘 자신했다. 어떤 리그에서든 기회를 잡으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늘 나를 믿고 신뢰와 성원을 주었다. 분명히 이루어질 테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 언제까지 야구를 하고 싶은지.

▶ 내가 팀에 기여할 수 있는 한 뛰고 싶다. SK 와이번스에서 야구 생애의 정점을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고 높은 기여도를 보이지 못한다면, 물론 그러면 팀에서 먼저 조치를 하겠지만(웃음), 그때에도 뛸 생각은 전혀 없다. 팀의 승리를 위해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한 계속 이곳에서 뛰고 싶다.


- 올해 SK 팬도 많이 늘고 더 열광적인 것 같다. 팬에 대한 생각은?

▶ 정말 감사하고 멋지고 또 겸손하게 된다. 시내를 다니다 나를 알아보시고 응원해주시고 사인을 부탁하고 하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올해 로맥 유니폼을 입으시는 분도 늘어난 것 같고, 팀에 대한 응원도 더 뜨거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팬들이 나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팀에 더욱 기여하고 싶다. 이 팀의 유일한 외국인 타자라는 것은 큰 영광인 동시에 더욱 큰 책임감을 느낀다.


- 가족들은 잘 적응하고 지내나.

▶ 가끔 아내와 한국 생활이 캐나다 고향보다 더 잘 조합이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다. 아들 내시가 할 것도 아주 많고 정말 즐겁고 분주하게 보내고 있다.


- 마지막 질문이다. 미스터 로맥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 음, 야구는 내가 하는 직업이지만 동시에 내가 삶 내내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17세에 프로 선수가 됐고 계속 야구를 했으면, 오프 시즌에는 고향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야구는 나와 가족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주었다. 경제적으로도 야구에 은혜를 입었고, 동시에 매일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었다. 매일 야구장을 들어설 때마다 설레며, 얼마나 큰 특권을 야구가 내게 주었는지 한 시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팬들에게나 야구에게 갚아야할 것이 많다. 신이 나를 야구 선수로 선택해준 데 감사하며, 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뛸 것이다. 아마도 현역에서 은퇴를 한 후에도 야구와 함께 하지 않을까.


- 앞으로도 행운을 빈다. 긴 인터뷰 고맙다.

▶ 즐거운 인터뷰였다. 고맙다.


올 시즌을 앞두고 홈런왕 전망을 해달라는 요청에 3명의 후보로 최정, 박병호, 로맥을 꼽았습니다. 2년차인 로맥인 캠프부터 철저한 준비로 시즌을 잘 준비하는 과정을 봤습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놀라운 파워를 지닌 로맥은 야구에 관한한 비슷하게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이도 했습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16년 전 루키리그나 싱글A 시절 기록도 모두 머리에 담고 있었습니다. 17세에 프로에 데뷔해 11년 만에 처음 미국 메이저리그에 올랐고 그리고 15년차에 KBO리그에 자리를 잡은 로맥의 야구 인생은 이제 확 피어나기 시작한 느낌입니다.

(로맥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위를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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