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돌부처 오신 날, 자애로운 장면 2개 

조회수 2018. 5. 21. 11:1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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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투구가 끝났다. 이제 플레이볼 사인만 떨어지면 첫번째 공을 던져야 한다. 그 때였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갑자기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는 1루쪽 관중석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본부석을 향해서도 또 한번 의식을 거행했다.

따뜻하고, 커다란 박수가 쏟아졌다. 린동원으로 불리던 그가 사직구장 첫 등판에 앞서 행한 의식이었다. 작년 시즌을 마치고 언짢은 구설(보류권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거구의 서양인 선수가 90도로 허리를 꺾자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앙금도 눈 녹듯 사라졌다.

                                                                                                                                                                 SBS Sports 중계 화면

그런가 하면 조금 다른 장면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제(20일) 광주 챔피언스 필드였다. 3회를 마친 원정 팀 덕아웃에서 생긴 일이다.

수비를 끝낸 선수들이 돌아왔다. 분위기가 별로다. 직전 수비에서 2점을 잃었기 때문이다. 1-1로 팽팽하던 승부가 3-1로 기울었다. 기분이 좋을 리 있나. 특히 투수의 표정이 안좋다. 중계방송하던 MBC Sports+가 매의 눈을 발휘했다. 광고 시간에 있었던 짤막한 퍼포먼스 하나가 화면으로 옮겨졌다. 주인공은 와이번스의 선발 투수인 메릴 켈리다.

그는 덕아웃에 들어오면서 글러브와 모자를 패대기쳤다. 여기까지야 뭐 흔한 일이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잔뜩 성이 난 그를 달래주려고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정수성 코치였다. 아마 어깨를 다독일 마음이었던 같다. 왼손으로 등(어깨?)을 감싸려는 순간 불같은 ‘화’가 돌아왔다. 마치 ‘그 손 치워’라고 소리치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긴 뭐. 천사같은 커쇼조차 그렇다. 등판일만 되면 살벌한 전사 모드다. 행여 눈길이라도 마주칠까 모두가 전전긍긍이다. 어설픈 위로? 오히려 기름 붓는 격일 지 모른다.

                                                                                                                                                        MBC Sports+ 중계화면

외국인 선수다. 문화적 차이는 엄연하다. 감안하고 받아들여야 서로가 편하다. 다르다는 게 무작정 손가락질 받을 이유는 아닐 것이다.

선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평판이 결정된다. 둘 중 하나다. ‘그 친구 참 진국이네’ 또는 ‘어디서 못되게 배워가지고...쯧쯧’.

굳이 린드블럼과 켈리를 꺼내든 것은 이유가 있다. 또 다른 외국인 선수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멀리 토론토까지 가서 객지 생활하는 떠돌이 투수 때문이다.

벨트레 사건과 임창용의 '창조 견제'

6회였다. 잘 나가던 선발(샘 가비글리오)이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1사 후 2루타에 이어 볼넷까지 허용했다. 4-0에서 맞은 1, 2루의 위기다. 감독이 타임을 걸었다. 천천히 마운드로 올라가더니 “여기까지”를 통보했다.

궁금했다. 이어받는 게 누굴까. 불펜의 문이 열렸다. 크지 않은 체격이 달려나온다. ‘맙소사. 감독 양반 제 정신이야?’ 이틀 전에 영혼까지 털린 투수 아닌가. 하루만에, 그것도 같은 팀을 상대로 또 등판시키다니. 도대체 뭘 믿고 저러나 싶었다.

그러나 웬걸. 씩씩한 그는 이틀 전과 전혀 다른 투수였다. 7회까지 무려 1.2이닝을 깔끔하게 지웠다. 비록 역전패로 빛이 바랬지만 나름대로 자기 몫은 확실하게 책임진 셈이다.

와중에 주목할 대목이 있었다. 2사 1, 2루에서 더스틴 파울러를 상대할 때였다. 거슬리는 장면이 나왔다. 대기 타석에 있던 조나단 루크로이다. 그는 슬금슬금 포수 쪽으로 이동하더니 어느 틈에 바로 뒤쪽까지 옮겨왔다. 언뜻 보면 타자 2명을 상대하는 모양이다.

가뜩이나 타석(파울러)과 승부도 만만치 않았다. 주자를 2명이나 등 뒤에 둔 상태였다. 조심스러운 로케이션 탓에 볼이 연속되며 카운트도 몰리고 있었다(결국 볼넷). 그런 상황에서 대기 타석까지 눈 앞에 어른거리니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닐 것이다.

                                      지난 해 벨트레가 대기 타석을 옮기는 장면. 이로 인해 퇴장 조치를 받았다. mlb.tv 화면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작년 7월에 사건이 있었다. 당시 무대는 텍사스 알링턴 구장이었다.

8-18로 이미 승부가 기운 8회였다. 2루심이 경기를 스톱시켰다. 그러더니 대기 타석을 향해 주의를 줬다.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사인이었다. 왜? 너무 많이 나갔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 경기 루크로이와 비슷했다. 포수 뒤쪽까지 가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받은 선수는 반발했다. ‘이게 뭐 어때서?’ 그러더니 야구사에 남을 퍼포먼스를 시전했다. 대기 타석을 표시해 놓은 고무 매트를 끌어다가 자기 편한 자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관중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34년 경력의 심판 조장 게리 데이비스(2루심)가 좌시할 리 없다. 즉각 반역을 진압했다. ‘퇴장’. 항의하기 위해서 달려나온 제프 베니스터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도 나가.’ 2명이 경기장에서 쫓겨났다.

대기 타석 문제로 논란이 일어난 것은 비단 그쪽만이 아니다. KBO 리그에서도 그랬다. 유명한 임창용의 ‘창조 견제’ 사건이다. 2016년 임창용은 2루 주자 오재원을 견제구로 저격하는 행동으로 사무국의 징계를 받았다. 문제는 원인이다. 본인의 침묵으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앞선 대기 타석 때 오재원의 위치가 빈정상하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임창용의 창조 견제의 원인이 된 것으로 의심되는 오재원의 대기 타석 위치.                        Sky Sports 중계화면

<관련기사 - 야구는 구라다, 추신수의 위치도 오프사이드였나 - 대기 타석 논란

http://v.sports.media.daum.net/v/20170728090245168 >

짜증나게 했던 루크로이의 대기 타석 위치

사실 대기 타석(on deck circle)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역시 불문율의 영역으로 봐야 한다. 무던한 투수들은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물론 제이미 모이어 같은 투수들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즉각적인 항의가 발사된다. ‘저 친구 좀 못나오게 해줘요.’ 그럼 심판은 시정해야 한다. “작은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고) 너무 집요하게 달려든다.” 모이어가 질색하는 이유다.

돌부처인들 왜 아니겠나. 따져보시라. 얼마나 짜증나겠나. 가뜩이나 직전 등판에서 한껏 말아먹었다. 여기서 꺾이면, 당분간은 까마득한 내리막이다. 게다가 모처럼 이기는 경기였다. 와중에 스트라이크는 안들어가고 볼만 내리 3개였다. 그럼에도 뒤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린다. 타이밍을 위해, 구질 관찰을 위해 호시탐탐이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을 것 같다. “비켜!” (아시다시피 루크로이는 2사 만루에서 1루 땅볼로 열반하셨다.)

             어제 경기, 포수 뒤쪽에서 신경쓰이게 만들었던 루크로이의 위치.                                                             mlb.tv 화면

이 장면은 뭐 그렇다 치자. 너무 민감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돌부처의 진정한 자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이틀 전 홈런 맞고, 3실점으로 탈탈 털릴 때다.

3-1에 나와서 7-1이 된 다음에도 이닝을 마치지 못했다. 2사 후에 볼넷을 허용해 1, 2루가 되자 벤치에서 타임을 걸었다. 교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때부터 그의 행동을 눈여겨봐야 한다. 감독이 덕아웃을 출발해 마운드에 오를 때까지다.

야수들이 모이고, 포수 러셀 마틴이 다가온다. 그러자 투수는 자기 가슴을 손을 툭툭 친다. 입 모양은 ‘마이 배드(My bad)’였다. ‘내 잘못이야’라는 뜻일 게다. 굳이 풀이하자면 이런 의미다. ‘니 볼배합은 문제 없었어. 내 공이 시원치 않아서 그런 거야.’

그리고….

돌부처의 그릇의 크기를 느낄 수 있던 순간

<…구라다>가 정작 몇 번이나 눈을 비빈 장면은 따로 있었다. ‘마이 베드’를 되뇌이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감독이 타임을 부르고, 자신이 마운드를 떠나야한다는 사실을 안 직후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운드 바닥 정리다. 자기가 던지며 파놓은 부분을 발로 고르며 다지고 있었다. 왜? 다음 투수가 올라오면 불편할까봐.

이게 말이 되는 얘긴가? 평상시라면 모른다. 완전히 망한 경기였다. 어렵게 이어가던 무실점 행렬이 풍비박산 났다.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 관리하던 ERA는 야간 할증 미터기 올라가듯 한없이 치솟을 게 뻔한 순간이었다.

그런 감정이 소용돌이 칠 때였다. 소리라도 지르고, 글러브 집어던지고, 덕아웃에 들어가 뭐라도 때려부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한계 상황이었다. 그런데 담담했다. ‘마이 배드’를 인정했다. 동료 투수를 위해 다소곳하게 땅을 골라줬다.

혹자는 그렇게 얘기한다. 멘탈이 강하다고. 그래서 패배를 빨리 잊고, 다음 경기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그게 경기력에 도움이 되고, 아니고는 다음 문제다. 그런 걸 따지기 전에 봐야할 부분이 있다. <…구라다>는 그걸 그릇의 크기라고 믿는다.

어쩌면 돌부처는 그럴 지 모른다. 중생들의 더 큰 안식을 위해 굳이 화요일을 택해서 오신 (올해만?) 부처의 뜻과 닮았는 지 모른다. 마치 자애로운 염화미소처럼….

                                                                                                                                                                                 mlb.tv 화면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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