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 코리안드림]모든 역경을 딛고 이글스의 에이스로 도약한 키버스 샘슨

조회수 2018. 5. 7. 11: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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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4경기 연속 QS 등 샘슨은 기대하던 모습 과시하며 이글스 선발진의 선봉에 서

오키나와 캠프에서 본 키버스 N. 샘슨(27)은 힘이 있는 강속구에 다양한 변화구를 잘 구사하는 아주 좋은 투수였습니다. 그런데 시즌 초반 볼넷을 남발하며 기대에 못 미쳐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샘슨에게 위기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청소년기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입양되는 등 쉽지 않은 삶을 해치고 나온 그는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오늘도 한화 이글스의 에이스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키버스 샘슨은 최근 4경기 연속 퀄리트 스타트를 기록하는 등 이글스의 에이스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2승3패 4.66의 기록보다 훨씬 좋은 내용의 피칭을 하고 있습니다.


- 우선 키버스(Keyvius) 독특한 이름이 눈길을 끈다. 누가 지어준 것인가?

▶ 이모가 지어준 것이다. 원래 사촌형에게 지어주려고 했다는데 이모부의 이름을 따서 주니어로 지은 후 내게 그 이름을 주었다. 어머니도 형이 주니어라서 내 이름을 3세로 지을지 고민하다가 이모의 권유로 그 이름으로 지었다.


- 형제가 많은가?

▶ 형이 셋, 누나 하나, 여동생 둘이 있다. 그런데 나는 입양아다.


- 입양된 것은 처음 듣는데.

▶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많이 편찮으셨다. 대모가 나를 돌봐주시기는 했지만 혼자 지내기가 힘들었는데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야구를 하고 내가 투수를 하면 포수를 맡았던 가장 친한 친구네서 나를 입양했다. 입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아버지도 돌아가셨다.


- 어려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감이다.

▶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새 가족이 정말 잘 대해줬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잘 성장했으니 감사한다.


- 중간 이니셜 N은 무엇의 약자인가?

▶ 나다니엘의 약자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이다. 아버지 성함이 나다니엘 샘슨이었다.


- 야구는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나나?

▶ 물론이다, 아는 야구와 함께 자랐다. 아버지도 야구를 하셨고 어머니는 소프트볼 선수를 하셨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부모님과 캐치볼도 하고 야구가 생활이었다. 풋볼이나 농구 등 다른 운동도 했지만 야구는 늘 나의 첫 사랑이었다. 어려서부터 늘 야구와 함께였다.


- 이복형제들과도 야구를 많이 했겠다.

▶ 아, 물론이다. 늘 캐치볼도 하고 야구를 함께 놀았는데 내가 늘 가장 어리고 작았다. 그러다가 체격이 커지면서 점점 내가 야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형들도 내 실력을 인정해줬다. (웃음) 나의 친부모님과 입양된 가족 모두 야구를 정말 좋아했고, 늘 야구와 함께였다. 실제로 양쪽 집안에서 풋볼을 한 것도 내가 유일했다. 풋볼도 꽤 잘 해서 대학 장학금 얘기도 나왔지만 나는 야구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했었다.


- 그런데 어려서는 체격이 작았나보다.

▶ 정말 작았다. 고등학교 때도 175cm 정도에 아주 말랐었다. 지금 체격과는 비교도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래도 갈수록 체격이 커져서 야구도 더 잘 할 수 있게 됐다. 풋볼도 러닝백, 쿼터백, 세이프티 등의 포지션을 했을 정도로 나중에 체격이 커졌었다.


- 운동 신경이 대단히 좋았네.

▶ 뭐 약간 괜찮은 편이었다. (웃음)


- 포리스트 고교에서 스타였다는데.

▶ 야구, 풋볼, 농구를 모두 했었다. 그러나 고2가 되면서 다른 건 중단하고 야구에만 전념했다.


- 늘 투수였나?

▶ 아니, 고등학교 가서는 외야수로 시작했다. 어려서 투수를 하기도 했는데 고교 감독님은 나를 외야수로 기용했다. 주변에서 내가 공을 잘 던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무슨 일인지 투수를 시키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1학년 시즌 끝날 때쯤 지역 챔피언십 경기에서 갑자기 나를 선발 등판시켰다. 나는 9회까지 던졌는데 1-1인가 어쨌든 여전히 동점이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많은 공을 던졌으니 그만 던지게 하면 좋겠다고 감독님에게 말씀하셔서 교체됐다. 그 경기 이후부터 팀의 에이스가 됐다.


- 그리고 2009년 드래프트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레스가 4라운드에 지명했다. 어떤 기분이었나.

▶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샌디에이고에서는 접촉이 거의 없었고, 텍사스에서 관심을 보였었다. 조금 더 이른 라운드에 지명될 수도 있다는 예상이었는데, 또 다른 팀들에서 접촉을 했을 때 의견이 맞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프로의 세계에 대해 나도 양아버지도 전혀 몰랐다. 우선 드래프트에 응하고 나중에 계약금 등 협상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절차 등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대치 않았던 샌디에이고가 나를 지명했다. 그러나 몇 라운드 그런데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 선수가 된다는 것 자체가 나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지들 모두에게 큰 기쁨이었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났었다.


- 오리건 주 유진에서 프로 생활이 시작됐다.

▶ 그 전에 애리조나로 가서 신체검사를 하고 몇 경기 뛴 후에 2010년 싱글 A 유진 팀에서 뛰기 시작했다. 2011시즌에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의 싱글A에서 12승3패(평균자책점 2.90)를 기록해 팀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 같아. 다음 해 더블A에서도 팀 최다승, 최다 삼진을 기록하자 2013년에 AAA로 올렸는데 조금 고전도 했다. 그래서 더블A로 다시 갔다가 커터를 익히면서 60이닝 동안 100개 넘는 삼진을 잡는 등 상당히 잘 던졌다. 그래서 2014년에 AAA에서 풀타임을 뛰었다.


우완 정통파 투수인 샘슨은 평균 구속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에 체인지업, 슬라이더(커터), 체인지업을 다양하게 구사하며 한국에 와서 포크볼도 배웠습니다. 제구력도 갈수록 안정감을 보입니다. 


- 그런데 빅리그 데뷔는 샌디에이고가 아니라 신시내티였다.

▶ 2013년 9월에 빅리그 승격을 기대했는데 부르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FA도 앞두고 있었고, 조금 실망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2014시즌이 끝나고 나를 40인 로스터에서 제외하면서 웨이버 공시했는데 신시내티가 나를 데려갔다.


- 그리고 신시내티 첫 해에 빅리그 데뷔를 하게된다.

▶ 2015년 레즈에서의 첫 스프링 캠프에서 잘 던지다가 부상이 왔다. 그래서 재활을 거쳐 더블A로 갔다가 곧 트리플A에 합류했다. 그러다가 처음 빅리그 승격을 하게 됐다. 그리고 2년간 빅리그를 경험했다.


- 승격 소식을 듣는 순간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사실 좀 복잡했었다. 당시 선발로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직후였는데 당시 딜라이노 드쉴즈 감독이 나를 불펜으로 보낸다고 했다. 내 평생 최고의 감독님인데 그런 조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신시내티 레즈에서 원한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빌 홈경기에서 구원 등판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감독님은 어제 던졌으니 그날 등판은 없다며 쉬다가 느긋하게 경기장에 나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 있느냐며 전화를 하셨다. 막 운동장에 도착했다고 했더니 감독실로 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불펜은 어떤지 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제 빅리그로 간다!’라고 하셨다. ‘가서 네 실력을 맘껏 뽐내보라!’로 하셨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 그래서 바로 이동했겠다.

▶ 곧바로 비행기를 타고 신시내티로 갔을 뿐 아니라 그날 밤에 바로 데뷔전을 했다. (웃음) 7월 30일 피츠버그와의 홈 경기였는데, 1이닝 동안 삼진 2개를 잡고 무안타로 끝냈다.


- 그날은 부모님이나 형제들 아무도 운동장에 못 왔겠다.

▶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3일 후 피츠버그와 경기에 선발로 나섰을 때는 모두 와서 나를 응원해주었다. 5이닝 동안 72구를 던지며 3실점했으니 괜찮았는데 패전 투수가 됐었다. 삼진도 6개인가 잡았고.

그러나 가족들 모두가 그 자리에 왔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정말 긴 여정이었고, 늘 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양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그 순간을 함께 했다.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


- 첫 승은 원정 애리조나였다. 투수에게 상당히 까다로운 곳인데.

▶ 맞다, 공이 꽤 멀리 날아가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젊었고, 내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강한 팀을 상대했지만 열심히 던졌고 6이닝 1실점으로 잘 던져 승리 투수가 됐다.


- 그리고 2년을 빅리그에서 뛰었지만 기복이 있었고, 마이너를 오갔다. 아까 잠깐 말했지만 지금 같으면 좀 다르게 했을 것이라고 했는데.

▶ 그렇다. 그때는 어렸고 내 경기를 펼치지 못했던 것 같다. 늘 포수의 리드를 따랐고, 포수는 베테랑들이었다. 물론 포수를 믿어야하지만, 때로는 내가 던지고 싶은 방식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시즌에는 구원 투수로도 많이 뛰었고 점차 나의 패턴을 찾게 됐다. 마지막 경기에서 많은 실점을 내주기 전까지는 평균자책점도 2점대, 3점대를 오갔다. 그런데 시즌 후 의외의 소식을 접한다.


- 의외라면?

▶ 시즌이 끝나고 신시내티는 나를 40인 로스터에서 뺐다. 젊은 팀이었고, 나도 젊었고 그들과 미래를 함께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다른 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왜 내가 로스터에서 빠졌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솔직하게 ‘모르겠다.’는 말 뿐이었다.


- 프론트 오피스에 변화가 있었나보다. 야구도 정치적이니까.

▶ 단장도 바뀌고 변화가 있기는 했다. 나는 그들이 드래프트한 선수가 아니었고 내게 큰 투자를 하지도 않았다. 아마 다른 선수들을 키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시내티를 떠나게 됐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와 신시내티를 네게 기회를 주었던 고마운 팀이고, 지금도 그 팀과의 인연, 그들이 내게 준 많은 것들에 늘 감사한다.


- 작년에는 애리조나와 마이애미 마이너에서 뛰었는데 빅리그의 기회는 없었다.

▶ 내 성적이 엉망이었으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웃음) 애리조나로 가면서 스프링 캠프에서 좋으면 불펜 투수로 시즌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귀띔이 있었다. 그런데 캠프에서 아주 좋았는데도 마이너로 배치됐고, 실망이 컸다. 야구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성적에 그대로 반영이 됐다. 그래서 팀에 방출을 요청했다.


- 방출을? 그만둔다는 뜻인가?

▶ 내가 팀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애리조나 팀에서는 방출을 원치 않았지만 2주간 에이전트가 계속 이야기 끝에 결국 나를 내보내줬다. 그래서 집으로 갔다. 2주 정도 생각을 하며 결론은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26살이지만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에이전트인 레지 제퍼슨씨가 나를 계속 설득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이 있는 또 다른 아버지 같은 분인데, 저녁 초대를 해서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다.


- 결국 다시 야구를 하게 된다.

▶ 한 달 정도 쉰 것 같다. 마이애미에서 계속 연락이 왔고, 다른 팀에서도 접촉을 했다. 결국 마이애미와 계약을 했고, 트리플A 뉴올리언스에서 남은 시즌을 보냈다. (6경기 선발 포함 14경기에서 1승2패 4.95를 기록)


- 그리고 한국행이라는 큰 결정을 했는데.

▶ 시즌이 끝나고 난 마이너리그 FA가 됐다. 집으로 돌아가 미래를 어떻게 할지 고민을 했다, 야구를 계속할 것인지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지. 그때 에이전트가 전화를 해서 한화 이글스가 나를 원한다고 전했다. 한화와는 지난 2,3년간 접촉이 있었다. 레지(에이전트)는 MLB팀에서도 계속 연락이 오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나는 야구를 계속할지 확신이 없다고 했다.


- 야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건가?

▶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하고 싶었다. 비즈니스, 통계학, 회계학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 내 회계사를 만나면 많은 것을 물어보고 배우기도 하는데 언젠가는 내가 직접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 한화에 오겠다는 결심을 한 계기가 있나.

▶ 우선 경기 동영상 등을 찾아봤다. 야구 문화가 미국과는 많이 달랐다. 레지는 여기서 야구를 포기하면 안 된다며 1년 계약이니 한 번 도전을 해보자고 계속 권유했다. 이글스 관계자들은 적극적이었고 솔직했다. 과거에 비해 계약 조건이 조금 낮아졌지만 외국인 선수들이 계속 부진하는 등 팀의 상황이 그렇다며, 꼭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솔직함과 나에 대한 존중이 마음에 들었다. 한화 관계자들이 탬파로 찾아왔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결심을 하게 됐다.


- 부인의 생각은 어땠나?

▶ 헤일리는 100% 내 뜻을 지지했다. 그녀도 오번 대학에서 소프트볼 선수였고, 현재는 리버티 대학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만약에 한국행을 결정한다면 최선을 다해 100%를 쏟아 부으라며 내 결정을 무조건 지지한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즐거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지금 그대로 되고 있다. (웃음)



샘슨은 캠프 때부터 한용덕 감독이 기대했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어떤 팀의 에이스와 붙어서 승산이 있다는 한감독의 평가가 나왔습니다.


- 오키나와 캠프부터 한용덕 감독의 기대가 정말 컸다. 그러나 시즌 초반은 쉽지는 않았는데.

▶ 초반 나는 투수가 아니라 그저 공만 강하게 던지려고 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다 보니 내가 가진 무기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실수한 것은 캠프에서 투구수를 더 많이 끌어올리지 못한 점이었다. 시즌에 접어들 때 투구수를 70-80개 정도 이상 끌어올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고, 시즌 초반에는 투구수가 70개만 되도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더욱 힘이 들어가고 제구가 흔들리고. 준비 과정에서 전적으로 내 실수였다. 그러다가 투구 코치가 모든 공을 전력투구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있었다.


- 과거에 하던 피칭을 못하고 있었나보다.

▶ 그렇다. 드쉴즈 감독이 하시던 말씀이 있다. 투수답게 스트라이크존을 폭넓게 사용하면서 꼭 필요할 때는 구속을 끌어올리면 된다. 위-아래, 좌-우를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피칭을 하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얘기를 했었고, 실제로 나는 그런 피칭을 했었다. 투수 코치와 불펜 코치랑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다시 깨닫게 됐다.


- 지난 두 경기 연속 볼넷이 없다. 그런데 새로운 것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제 모습을 찾은 셈이네?

▶ 바로 그렇다. 경기가 안 풀리고 슬럼프가 오면 당연한 것들도 못 보게 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기도 한다. kt전(4/7 5이닝 2실점 패전) 후에 아버지가 ‘야구를 다시 즐기는 게 어떻겠느냐’는 문자를 하셨다. 시즌 초에 할아버지랑 형이랑 한국에 오셨었고, 지금도 내 경기는 모두 챙겨보신다. 문자를 받고 깜짝 놀라기도 했고, 생각이 많았다.


- 야구의 즐거움을 다시 찾은 것 같은데.

▶ 정말 야구가 즐겁다. 매일 야구장에 가서 새로운 것도 배우고 더 나은 투수가 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주 즐겁다. 비디오룸에 가서 다음 경기를 대비해 타자들도 보고, 스카우팅 파트와 내가 약점이 없는가, 똑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는지 등을 이야기하고 배운다.


- 공부를 열심히 하네.

▶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스카우팅 파트도 그렇고 코치님들도 그렇고 모두 정말 열심히 한다. 내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수정할 수 있으면 하고, 다음 경기에서는 더 잘 던지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늘 야구는 시청하는 편이다. 경기 후 집에 가서도 모든 야구 하이라이트를 다 본다. 특히 다음번에 만날 팀은 열심히 본다. 야구를 사랑하고 늘 배우면서 준비를 한다.


- 야구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되찾은 모양이다.(웃음)

▶ 한국에 와서 정말 그렇게 됐다. (웃음) 아내도 그 얘기를 한다.


- 중계를 하면서 얘기도 했지만 샘슨의 강점은 모든 구질을 스트라이크로 던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동의하는지.

▶ 동의한다. (웃음) 모든 구종을 언제든 스트라이크로 던질 자신이 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너무 완벽하려는 성향도 가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실투가 나올 때도 있어서 항상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난 LG전에서 홈런을 맞았는데, 포수 지성준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실수라고 했다는 말을 통역에게 들었다. 그러나 그건 완전히 나의 실투였다. 포수가 요구한 코스로 제대로 넣었으면 문제가 없었다. 홈런이든 안타든 대부분 내 실투 때문이다. 지성준은 젊지만 능력이 뛰어나고 오래 좋은 포수로 활약할 선수다. 그리고 아주 좋은 친구다.


- 한국에서의 삶은 어떤가?

▶ 지금까지 정말 좋다. 팬들은 늘 알아보고 응원을 해주신다. 팀에서도 동료들과 코치들 모두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친구로서 잘 대해준다. 아내 헤일리는 아기를 낳기 위해 곧 미국으로 가지만 한국 생활을 즐거워한다.


- 첫 아기가 아들이라고 들었다. 이름은 지었나?

▶ 아들 맞다. (웃음) 이름은 카이어스 라고 지었다. 헤일리가 정했다.


- 한국 음식은 어떤가?

▶ 고기들도 맛있고 한국 음식은 입에 잘 맞는다. 우리 부부는 음식을 하는 것을 즐겨서 집에서 요리를 종종 하지만 맛있는 한국 음식들을 먹으러 다니는 것도 즐겁다.


- 팬 문화도 많이 다르지 않나.

▶ 말이 필요 없다. (웃음) 응원 문화가 많이 다른데 아내가 정말 좋아한다. 응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거의 다 익혔다. 이미 응원가, 댄스 등을 많이 외웠다. 그건 내게도 아주 중요하다. 아내가 한국의 문화와 삶을 즐긴다면 내가 선수생활을 하는데도 큰 힘이 된다. 이제 시즌이 초반이지만 계속 좋은 모습을 유지하면서 내년에도 이곳에서 뛸 수 있다면 아내도 행복해야 한다.


-한국 타자들은 어떤가? 기대했던 수준인가.

▶ 솔직히 잘 몰라서 예상을 못했었는데 대단히 인상적이다. 파워가 있는 타자도 많고 공을 맞으러 나오는 것도 정말 빠르다. 초반에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했을 때 한국 타자들이 속구를 정말 잘 대처한다는 것도 배웠다. 다양한 구종으로 스트라이크존을 제대로 넓게 사용해야지만 KBO리그의 타자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맞추는 능력이 뛰어난 타자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열심히 타자들을 공부하고 있다. 그들도 나를 공부할 테니 나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


- 샘슨 야구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 것 같은가.

▶ 한화 이글스에 와서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시 찾았다. 몸 상태도 아주 좋고 기분도 좋고, 가능한 한 오래 이곳에서 뛰고 싶다.


- MLB도 여전히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 물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마이너리그 계약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 좋고, 대전과 한국 생활도 아주 즐겁다. MLB에서도 나를 보고 있을 테고 친구들, 코치들에게 연락도 온다.

그러나 현재에 집중하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늘 최상의 상태로 마운드에 올라 우리 팀을 도와 플레이오프에 가는 것이 현재 내게 주어진 임무다.


- 이글스가 플레이오프에 갈 수 있다고 보나.

▶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보고 있고, 또한 우리는 발전의 여지도 아주 많다. 나도 이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다른 젊은 투수들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우리는 강한 불펜을 보유했고, 타선도 점점 짜임새를 갖춰가고 있다. 우리가 실수를 좀 많이 했는데 그게 야구 아닌가? 완벽한 팀은 없고, 그런 실수를 넘어서서 점점 강한 팀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플레이오프에 갈 수 있고,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할 수 있다.


- 마지막 질문이다. 샘슨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 내게 야구의 의미는 정말 크다. 우선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아버지와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야구다. 그분들에게 야구를 배우고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아들과 자식들에게 그걸 연결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야구는 나의 삶이다. 내가 아는 것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아내, 가족과 함께 야구는 나의 사랑이다. 능력이 있는 한 오래도록 야구를 하고, 그리고 다른 삶을 살아볼 생각이다.



만 27세인 키버스 샘슨은 보면 볼수록 한화 이글스의 복덩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투수이며, 무엇보다 앞으로 더욱 발전 가능성이 큽니다. 긍정적인 마음 자세와 늘 노력하는 성실함,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구위와 다양한 구종을 지녔습니다. 이글스가 젊은 에이스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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