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 코리안드림]열정과 냉정 그리고 책임감 두산의 새로운 에이스 후랭코프

조회수 2018. 4. 27. 13: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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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데뷔 후 5경기에 선발로 나선 그는 26일 현재 4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입니다.

1.88의 평균자책점은 LG 트윈스의 장수 외국인 투수 핸디 소사에 이은 리그 2위입니다.

- KBO리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 두산 베어스와 KBO리그에서 이루고 싶은 게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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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면서도 단단한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두산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오르는 세스 후랭코프


KBO리그 데뷔 후 5경기에 선발로 나선 그는 26일 현재 4승으로 다승 공동 선두입니다. 1.88의 평균자책점은 LG 트윈스의 장수 외국인 투수 핸디 소사에 이은 리그 2위입니다. 이닝당 주자 진루 허용 수치인 WHIP가 1.00이 안 되는 선발 투수는 SK 산체스와 소사, 후랭코프 뿐입니다.

두산 베어스의 새 얼굴로 벌써부터 팬들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선발 투수 세스 후랭코프(29)를 만났습니다.


평소는 느긋하고 웃음도 많은 후랭코프는 마운드에 서면 공격적으로 돌변합니다. 


- 이름이 제임스인데(James Seth Frankoff) 중간 이름인 세스를 쓰는 게 특이하다.

▶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동생도 그렇고 중간 이름을 부른다. 온 가족이 다 그런 건 아니고 내 딸도 첫 이름을 사용하지만 적어도 우리 셋은 그렇다. 제임스는 할아버지 이름을 받은 것인데, 어려서부터 부모님도 그렇고 다들 나를 ‘세스’라고 불렀다.


- 후랭코프라는 성도 이국적인데.

▶ 선조는 러시아 출신으로 안다. 그러나 우리 가족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 후손이다. 내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 주에는 스코틀랜드 계 후손들이 많다. 아마 북유럽 등 유럽계 이민자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웃음)


- 언제부터 야구를 했는지 기억하나?

▶ 내 기억이 남아있는 한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하며 놀았다. 늘 야구는 나의 열정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도 그렇고 가족 모두가 야구와 스포츠를 좋아했다. 야구는 나의 첫 사랑이다.


- 노스캐롤라이나 주 하면 대학 농구가 먼저 떠오르는데.

▶ 사실이다. 내 고향이 라일리 인근인데 주변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 듀크 대학,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NC State) 등 농구 명문들이 즐비했다. 나도 UNC를 다녔고 농구팬이기도 했지만, 야구 역시 큰 인기를 끄는 지역이다.


- 남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같이 야구를 했겠다.

▶ 물론이다. 세 살 어린 동생인데 늘 같이 야구를 했다. 동생도 필라델피아 마이너리그에서 투수를 했지만 지금은 야구를 그만두었다.


- 한 가족에서 두 명의 프로 투수가 나왔네.

▶ 그렇다. 우리 가족은 야구와 정말 밀접하다. 아내의 가족은 더 하다. 베스의 할아버지는 신시내티 투수였고, 장인은 다저스 산하에서 투수를 했으며 처남도 대학까지 투수를 했다. 내 주변엔 투수가 정말 많다. (웃음)


- 어머니도 농구 선수라고 들었다.

▶ NC 주립대학에서 농구와 소프트볼, 그리고 배구 선수를 하셨다. 아버지도 같은 학교에서 축구 선수를 하셨다.


- 아버지는 심판도 하셨다는데.

▶ 와, 조사를 정말 많이 했나보다. (웃음) 그렇다, 아버지는 여자대학 농구 심판을 20년 넘게 하셨다. 그래서 대학 농구도 우리 집안에서는 정말 인기 스포츠다. 그런데 두 분은 모두 NC 주립대를 나오셨지만 아버지가 UNC 농구팀 팬이셔서 나는 UNC 윌밍턴을 다녔다. (두 대학은 치열한 대학 농구 라이벌 관계)


- 어려서 다른 스포츠도 했나? 야구는 늘 투수였나?

▶ 축구나 다른 스포츠도 많이 하기는 했지만 늘 야구를 가장 좋아했다. 그러나 투수는 에이팩스 고등학교 졸업반 전까지는 거의 하지 않았었다. 주로 포수와 내야수를 했었다. 그러다가 2학년 때 가끔 투수도 하다가 고3때 본격적으로 투수를 시작해 대학에서 전적으로 투수를 했다.


- 아,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드래프트 안 된 모양이다. 언제 처음 프로 야구 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는지.

▶ 고교 졸업 때는 프로에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언젠가는 빅리그 마운드에 서고 싶고, 타석에 서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 그리고 2010년 오클랜드가 드래프트를 했다. 주변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 아주 아주 낮은 27라운드에 뽑혔다.(웃음) 그러나 드디어 꿈을 향한 시작이었고, 나는 물론 가족들, 여자 친구 모두들 정말 흥분된 순간이었다. 드디어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사건이었으니까.


- 마이너리그에서는 꽤 빠르게 승격을 거듭했는데. (4년 만에 트리플A 진출)

▶ 트리플A까지는 상당히 빨리 갔는데(2014년) 그때부터 쉽진 않았다. 그 후로는 꾸준히 기회를 잡는 게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시카고 컵스에서 드디어 빅리그에 데뷔할 기회를 얻었다.


- 더블A에서는 마무리 투수를 하기도 했더라.

▶ 맞다. 2014년 더블A 첫 시즌에 마무리를 했었다. (미들랜드에서 16세이브 기록, 다음 시즌 AAA에서도 8세이브) AAA에 가서는 마무리도 하다가 중간 투수도 하고 적응기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2016시즌부터 다시 선발 투수로 뛰었다. 선발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 빅리그 첫 경기 얘기를 해달라.

▶ 2017시즌에는 컵스 트리플A에서 온전히 선발 투수로만 뛰었다. 그리고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6월8일 트리플A 경기 선발 출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반경에 갑자기 감독님이 빅리그 승격을 축하한다며 어서 짐 챙겨서 시카고로 가라고 하셨다. 당시 아아오와 주 디모인에 있었다. 정신없이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가서 시카고행 비행기를 탔다. 리글리필드에 도착하니 4회인가 그랬다. 조 매든 감독 등에게 인사를 하고 불펜으로 갔다. 다행히 그날은 던지지 않았다. (웃음)


- 언제 첫 등판을 한 건가?

▶ 바로 다음날이었다. 누구에게나 빅리그 마운드에 처음 오른다는 것은 특별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네게는 그것도 역사와 전통의 리글리필드였는데다, 내 가족들이 모두 그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콜로라도전 구원 2이닝 4안타 1홈런 2삼진 2실점)


- 나도 정말 좋아하는 구장이다. 클럽하우스는 아직도 그렇게 작고 좁은가?

▶ 아, 완전히 리모델링을 했다. 빅리그 어떤 클럽하우스보다 넓고 편하고 좋다. 물론 원정팀 클럽하우스는 여전히 좁은 것으로 안다. (웃음)


- 그런데 그것이 빅리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기회가 없었다.

▶ 지금도 내게 기회를 준 컵스에게 고맙다. 그러나 야구나 삶이나 그런 것 아닌가. 9월에 기대를 했지만 다른 선수가 승격됐다. 컵스와의 인연은 아주 특별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 오프 시즌에 시애틀에서 데려갔고 40인 로스터에도 든 것으로 아는데. 그런데 갑자기 한국행 뉴스가 나왔다.

▶ 지난 겨울 웨이버 공시되자 시애틀이 나를 원했다. 40인 로스터에 포함시킨 것도 맞다. 그러나 시애틀에서 올 해 빅리그에서 뛸 수 있는 보장은 없었다. 빅리그 봉급도 좋지만 확실하진 않았고, 한국에서 더 많은 연봉을 보장했다. 시애틀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빅리그와 마이너를 오가며 생활했을 것이다. 두산 베어스의 제안을 뿌리치기에는 조건이 훨씬 좋았다.


두산에 새롭게 둥지를 큰 후랭코프는 KBO리그 진출에 일말의 후회도 없으며, 현재의 야구와 삶에 100%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 물론 아주 힘든 결정이기는 했다, 지금은 정말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시애틀에서 40인 로스터에도 들었고, 빅리그의 꿈은 여전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바로 다음날 웨이버 공시될 수도 있고, 불확실성이 더 컸다. 재정적으로 가족을 생각했고, 또 한국을 경험하면서 KBO리그에 도전하고 싶었다. 두산 베어스 최고 투수가 되고 싶다는 도전 의식도 있었다. 아내 베스를 비롯해 가족들 모두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줬다.


- KBO리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 좋은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다. 동영상도 많이 봤고 배트 플립(빠던)도 잘 알고 있었다. (웃음) 조시 린드블럼과는 미국서 함께 뛴 적도 있었고, 여기서 뛰었던 아는 선수들에게도 많은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마이너에서 오래 뛰었기 때문에 함께 뛴 선수도 많고, 상대팀으로 만난 선수도 많은데 그 중에 한국에서 뛴 선수도 꽤 있다. 삼성의 팀 아델만은 내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자랐고, 내 절친과 아주 친하기도 하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


-가족도 한국 생활에 적응을 잘하나. 음식은?

▶ 전혀 문제없다. 숙소도 코엑스 근처라 아주 편하고 전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한국 생활을 정말 즐기고 있다. 난 매운 음식도 원래 좋아한다. 한국식 중식이라고 들었는데 짬뽕도 아주 맛있다. 불고기, 비빔밥, 김밥 등 맛있는 게 정말 많다. 먹는 걸 좋아해서 아주 즐거운데 물론 아직 시도해볼 엄두가 안 나는 음식도 꽤 있기는 하다. (웃음)


- 한국말도 빨리 배우는 것 같다.

▶ 언어가 다르기는 하지만 한글을 배우고 있고 읽기를 익히고 있다. 단어도 많이 배웠고, 통역이 많이 도와주지만 동료들과도 가능하면 한국어를 배우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나쁜 단어도 좀 배웠고. (웃음)


- 야구는 어떤가? 야구 문화나 철학이 조금 다른 것을 느끼나?

▶ 같은 야구지만 당시 말대로 조금 다른 점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KBO리그는 공격에 중점을 두고 있다. 타자들이 정말 강하다. 따라서 나 역시 원래의 공격적인 성향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뭔가를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나의 강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 투구마다 집중해서 목적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던지면 나의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늘 경기에 임하려고 노력한다.


- 마운드에서 상당히 치열하더라. 성격이 원래 그런가.

▶ 평소에는 느긋하고 편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운동장의 흰 라인을 지나 마운드에 오르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타자들과 친구가 되려고 마운드에 오르는 건 아니다. 나의 팀을 위해 투쟁을 하고 승리의 기회를 잡기 위해 싸우러 마운드에 오른다. 공격적으로 타자들을 공략하는 게 임무다. 물론 다시 그 라인을 벗어나면 친구도 되고 그럴 수 있지만 마운드에서는 철저히 싸우려고 한다.


- 자신을 싱커볼 투수라고 여기나?

▶ 꼭 그렇지는 않다. 포심도 던지고, 커터와 커브, 체인지업도 던진다. 그날 그날 잘 먹히는 구종을 많이 던지고 경기마다 타자들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한다.


- 스트라이크존 적응은 어떤가.

▶ 메이저리그에서는 요즘 높은 공을 잡아주려는 경향이 강한데 KBO리그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심판들의 존은 꾸준하고 문제가 없다. 어차피 심판이 선수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존에 적응하는 것 아닌가. (웃음) 타자들과도 서로 적응하면서 싸우는 게 야구 아닌가. 매일 매일이 다르고, 적응은 나의 몫이다.


- 두산 베어스와 KBO리그에서 이루고 싶은 게 뭔가.

▶ 목표는 당연히 팀의 우승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수가 돼 팀에 승리의 기회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좋은 동료가 되고 싶은 것 역시 중요한 목표다. 개인적인 목표의 질문도 종종 받지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운동하고 항상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하면 개인적인 기록 등은 따라온다.


- 팬들의 질문도 있다. 포수 양의지는 후랭코프에게 어떤 의미인가.

▶ 그는 리그 최고의 포수다. 신념에 차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타자를 아주 잘 알고, 그의 리드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마운드에서 내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기 힘들 거다. 그리고 박세혁 역시 정말 뛰어난 포수다. 그 둘이 있는 한 난 걱정이 별로 없다. 호흡은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 가장 강력한 결정구는 무엇인가?

▶ (웃음)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나의 모든 구종으로 타자를 잡을 자신이 있다. 공격적으로 던지는 게 중요하다.


- 까다로운 타자를 꼽을 수 있나?

▶ 여기는 타자의 리그이다. 통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모든 타자를 똑같이 위험하다고 여기고 승부를 한다. 강한 타자들이 정말 많은 리그다. 아웃을 잡아내겠다는 나의 목표는 타자가 누구든 마찬가지다.


- 한국 팬에 대한 소감은?

▶ 정말 다른 문화와 환경이다. 점수와 상관없이 팬들은 시종일관 경기에 몰두하고 응원을 보내준다. 경기가 훨씬 재미있다. 사실 마운드에 오르면 집중하기 때문에 느낄 수 없지만 응원 문화는 정말 다르다. 끊임없이 음악과 응원이 펼쳐지고 응원가도 즐겁고 멋있고. 이미 적응은 끝났다.(웃음) 그런 팬들 앞에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고 감사하다.


시카고 컵스에서 작년 빅리그에 데뷔했던 후랭코프. 


- 빅리그의 기회가 아직도 있지 않을까.

▶ 그럴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아주 좋겠지만, 그걸로 크게 신경 쓰거나 걱정하진 않는다.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피칭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두산에서 야구를 하는 것이 행복하고,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 마지막 질문. 후랭코프에게 야구란 무엇인가?

▶ 야구는 나의 직업이고 내가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대변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정말 야구를 사랑하고, 나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세스 후랭코프는 야구 선수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친구, 좋은 가족이 되고 싶고 그런 것의 의미도 아주 크다. 좋은 사람으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본 후랭코프는 현실적이고 솔직하며 자신의 의무와 책임 등에 철저한 선수이자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임무가 주어지면 다소 예민하고, 또 다혈질적인 면도 보이지만(볼넷을 내주고 스스로에게 발끈한다든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최상의 외국인 선수 영입 사례로 가고 있습니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의 모습이 어떨까 생각도 들지만, 적응력이나 기본적인 마음 자세가 단단한 선수로 여겨집니다.



이 기사는 minkiza.com, koreabaseball.com, sports2i, Statiz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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