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노수광 기습의 복선-오재원의 이상 감각

조회수 2018. 4. 26. 08:02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SBS Sports 중계화면

사람들의 오버라고 생각했다. 문학구장 주중 시리즈에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 따위를 운운하는 얘기 말이다. ‘이제 겨우 4월인데 무슨….’ 설레발에 대한 저어함이 먼저였다. 그런 마음은 당연했다. 도전자는 아직 서먹하다. 겨우 4월 아닌가. 제대로 자리잡은 전력인 지 의심스러운 구석도 많다.

반면 지키는 자는 월등하다. 7할대 승률이 보증서를 써준 탄탄함이다. 공수주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다. 주전이 실려나가도 끄떡없다. 오히려 백업들이 더 무섭다. 최주환 같은 실력자도 30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자리잡는 곳이다.

절정 고수들의 위력은 9회 초에 번쩍였다. 박건우의 2점 홈런(3-3 동점). 한 박자 쉬고, 양의지의 솔로홈런(4-3 역전). 별로 힘도 들이지 않았다. 스윙 2번으로 간단히 판을 엎어버렸다. 문학동은 충격에 빠졌다. 홈 팬들은 전율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간신히 끌고 간 연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숨 돌렸다고 생각한 10회 초 2사 후. 내내 벤치만 지키던 조수행에게 일격을 당했다. 4-6.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승부라고 여겼다. 9회 말 동점도 천신만고였는데, 10회 2점 차이는 도대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동점은 커녕 승부를 결정짓는 끝내기가 등장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한 판이었다.

1루수와 2루수의 방향 착오를 일으킨 번트

본래는 10회 말도 그냥 넘어가야 했다. 6-6 동점이던 1사 3루에서 현란한 수비 하나가 모두의 퇴근을 막았다.

대타 정진기의 타구였다. 강하게 2루 쪽으로 향했다. 내야가 극단적으로 전진한 위치였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게다가 튀어오르는 어려운 바운드였다. 그걸 능란한 글러브 핸들링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끄덕임을 줄 수 밖에 없는 솜씨였다.

2사 3루가 되자 확률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야근, 시간당 임금, 막차 시간….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힐 무렵이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상품 하나가 등장했다. 초구 기습 번트였다. 그리고 결과는 아시다시피.

과연 이 번트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우선 기술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성공 요인은 힘과 방향이다. 범위에 포함되는 수비는 3명이다. 투수와 1루수, 2루수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처리하기 힘든 지점으로 굴렀다. 무엇보다 1루수와 2루수를 혼란에 빠트리는 힘 조절이 압권이었다. 조금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투수 : 타자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다. 번트 모션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와야 한다. 그러자니 방향에 대한 판단은 나중이다. 3루쪽인 지, 1루쪽인 지는 타구를 보고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전의 번트는 의도적으로 강한 힘을 썼다. 즉 달려나오는 투수를 통과하게끔(지나치게끔) 하려는 목적이었다.

1루수 : 오재일의 최초 스타트 방향을 보시라. 타구 쪽이었다. 자신이 공을 잡아서 처리해야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몇 걸음 가다가 방향을 바꿨다. 아차, 너무 멀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냥 베이스를 지키기로 마음을 바꾸게 됐다.

2루수 : 여기도 스타트가 잘못됐다. 처음에는 1루 베이스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오재일이 판단을 바꾸자, 자신이 공을 처리해야 했다. 직선 거리로 타구를 따라간 게 아니라 약간 우회한 것이다. 그 늘어난 거리만큼 타이밍이 늦어진다. 그 차이는 아웃과 세이프를 뒤바꿀 정도였다.

                                                                                                                                    SBS Sports 중계화면

실책, 견제사 - 이상 감각의 오재원

일반적으로는 지극히 확률이 낮은 기획안이었다. 상대 수비의 공력을 감안하면 그렇다. 도대체 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씹어도 이빨은 커녕, 손톱 자국 하나 내기 어려운 단단함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 사실은 가장 강한 곳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원정 팀의 2루수 자리였다. 그곳에서 몇 차례 이상한 징후가 나타났다.

물론 그 자리의 주인은 원래 독특한 캐릭터다. 여러 사건과 사고, 구설수에 연관됐다. 하지만 수비력이나 센스에 관해서라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만큼 2루수로는 독보적인 경쟁력을 지녔다.

그런데 그가 이 경기 종반에 거듭된 이상 감각을 보였다. 8회였다. 중전 안타를 치고 나가더니 1루에서 투수 견제에 걸려 횡사했다. 보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이은 수비에서는 더 황당했다. 김동엽의 라인드라이브 타구에 실책을 범한 것이다. 직접 잡았느냐, 원바운드 타구였냐가 관건이었다. 1루에 송구했어도 충분한 타이밍인데 괜한 고집을 피우다가 살려줬다.

물론 당시만해도 치명적일 것까지는 없었다. 실책은 병살 플레이로 만회가 됐다. 견제사는 나중에 동점, 역전 홈런으로 승부가 뒤집혔으니 그걸로 퉁 치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씁쓸한 뒷맛과 후회는 금세 회복되지 않는다. 미세먼지처럼 가슴에 남아 숨소리에 영향을 미친다.

                                                                                                                       SBS Sports 중계화면

전지적 참견 시점으로 당사자의 심경을 추론해보자. 앞에서 말했다시피 1사 3루에서 꽤 어려운 타구(정진기)를 막아냈다. 하마터면 큰 일날 뻔했다. 전진 수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처리하고 한 숨을 돌렸다. ‘8회에 두 번이나 낭패를 봤는데, 그것마저 놓쳤으면….’ 아찔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2사 후에는 수비 위치가 바뀐다. 어느 정도 깊이가 허용된다. 1루에서 타자만 잡으면 이닝이 끝나는 것 아닌가.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상대의 타격감이다. 요즘 좀 나가는 친구다. 그러고 보니 앞선 타석에서도 그랬다. 중견수 박건우가 펜스까지 따라가서 간신히 잡아낼만큼 엄청난 타구를 날렸다. 그게 빠졌으면 경기는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1사 1루 상황). 맞다. 얼마 전에는 연장에서 끝내기 홈런도 친 주인공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주저함은 물러섬을 만들었다. 크지도 않다. 한 걸음, 기껏해야 한 걸음 반 정도일 것이다. 조금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치겠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섰어요. 그런데 수비수들이 좀 뒤쪽에 위치해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 정도면 번트를 시도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경기 후 노수광의 코멘트)


                                                                                                                                           SBS Sports 중계화면

여러 사건이 암시한 것은 복선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기획이었다. 두산 내야를 상대로, 그 중에서도 가장 움직임과 센스가 좋은 오재원을 표적으로 기습을 시도한다는 것은 평소라면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앞선 이닝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다. 견제사와 실책, 그로 인해 남겨진 부담감이라는 마음의 무게. 여기에 상대에 대한 두려움(중견수 쪽 큰 타구)…. 이런 것들은 결국 미세한 판단력의 오차를 낳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가장 결정적이고, 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졌다.

하나의 사건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반드시 인과관계 아래서 존재한다.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선행(先行ㆍ앞서 행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복잡한 서사적 장치 속에서 암시가 이뤄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걸 복선(伏線)이라고 부른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