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도전 DNA 되살리자] 못다한 현역의 꿈.. "마지막 타석은 아직이다"

대전=이경원 기자 2018. 4. 23.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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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야구선수 김경언의 무한도전
김경언이 지난 15일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대전 중구의 한 커피숍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사인볼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경언은 현재 소속팀이 없다. 하지만 인근 고등학교에서 훈련하며 타석에 다시 들어설 날을 준비하고 있다. 대전=최현규 기자

작년 11월 한화서 ‘전력 외’ 통보
“더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이 너무 일찍 왔어요”
자비 들여 사이판에서 혼자 훈련… 흙바닥에 뒹굴며 티 배팅 연습

그는 “빠따(배트)를 칠 데가 없어서 되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말했다. 환호하던 만원 관중은 잠시 잊었다. 그는 이제 청주고, 공주고, 마산고 운동장에서 고등학교 선수들과 함께 흙바닥을 구르고 달린다. “옆에 있는 어린 선수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겠다”고 하자 전 한화 이글스 선수 김경언(36)은 “신기하긴, 한심하게 보겠죠”라고 말했다.

마지막 타석인 줄 알았다면

김경언은 “다시 타석에 들어서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대전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훈련 동료인 고교 선수들이 주말리그에 참가하는 때가 그에겐 휴식일이다. 구단을 나온 지 5개월이지만 몸이 날렵했다.

프로는 무서운 말을 에둘러 근사하게 한다. “자유계약선수(FA)로 풀어준다”는 말은 사실상 방출 통보다. ‘리빌딩’이란 재건이지만, 누군가에겐 정리해고다. 김경언은 지난해 11월 한화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구단 관계자가 “다른 갈 곳이 있다면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귀띔했다. 며칠 뒤 면담한 박종훈 단장이 “내년 우리의 플랜에 맞지 않는다. 같이 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말씀 다 하셨습니까? 알겠습니다.” 짐짓 당당히 일어섰지만 김경언은 그때 충격이 컸다. 한화에 새 감독이 오기로 예정됐고, 선수들 모두가 스프링캠프 합류를 위해 심기일전하던 때였다. 김경언은 “아직 더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이 너무 일찍 왔다”고 말했다. 17시즌을 치렀을 뿐 굉장한 노장은 아니었다. 1982년생인 그의 동기로는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 김태균 등이 있다.

“야구는 계속할 거지?” 단장실에서 들은 한마디가 그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는 지난해 5월인가 6월이었던 1군 마지막 타석을 떠올려 봤다. 이용규 대신 나간 서울 잠실구장이었고 3타수 1안타인 것 같은데, 어떤 투수가 무슨 볼을 던졌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가 마지막 타석인 줄도 몰랐다. 마음의 준비도 못하고 끝난 것이었다.” 김경언은 안타까워했다.

프로란 원래 그런 것

다른 구단들도 끝내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는 “성적이 좋은 구단에는 선수가 있고, 성적이 안 좋은 구단은 리빌딩을 한다며 나이든 선수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김경언은 “프로가 원래 그렇다”고 말했다.

유독 노장들에게 가혹한 겨울이었다. 김경언은 “성훈이 형(KIA 타이거즈 정성훈)도, 준석이(NC 다이노스 최준석)도, 태인이(롯데 자이언츠 채태인)도 정말 어렵게 팀을 구했다”고 했다. 모두 팬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강타자들이다. 김경언은 “그 정도 레벨이 그렇게 어렵게 구했는데, 내가 어떻게 구하겠느냐”고 덧붙였다.

김경언은 지난 2월 자비를 들여 사이판으로 출국했다. 구단에서 나와 혼자서 훈련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게 달랐다. 먹고 자고 이동하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체계적으로 조언하는 코치도, 식단을 관리하는 스태프도 없었다.

팀 스포츠인 야구이기에 혼자 하는 훈련이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야구장 시설을 혼자 쓸 수 없는 노릇이었고, 김경언 1명을 위해 배팅볼을 던져줄 이도 없었다. 김경언은 그저 달리고 또 달리고, 운동장 귀퉁이 그물망 앞에서 티 배팅이나 했다.

김경언은 지난달 귀국한 뒤 무턱대고 야구부가 있는 고교를 찾아다녔다. 대전 집에서 가까운 공주고와 청주고, 지인이 있는 마산고에 가서 훈련했다. KIA 타이거즈에서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김인철 청주고 감독이 많이 도와줬다. 김 감독은 “아직은 할 만하다. 아깝다”며 용기를 준다.

김경언은 지난달 독립야구단인 ‘저니맨 외인구단’ 선수들 틈에서 훈련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다. 저니맨에 입단한 것은 아니며, 그저 운동할 수 있는 구장을 찾아갔던 것이었다고 한다. 김경언은 프로 후배들이 전화를 걸어올 때면 “팀이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꼭 남긴다.

괴짜의 도전 DNA

김경언은 최근 성적이 미미했다. 사구(死球)로 인한 부상이 거듭되면서 그는 많은 게임에 나서지 못했다. 2016년 5월에는 KT 위즈와의 경기에 대타로 나섰다가 조무근의 공에 종아리를 맞아 근육이 파열됐다. 복귀한 같은 해 8월엔 NC 최금강의 공에 오른발을 맞았다. 새끼발가락 뼈에 실금이 갔다.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지난해에도 기회가 없는 편이었다.

사구가 원망스럽느냐고 물었다. 김경언은 “못 피해서 맞은 것이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공이 안 맞을 줄로 잘못 보고, 힘도 주지 않고 있다가 근육이 터졌다”며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맞더라도 안전하게 맞는 게 프로”라 주장한다.

김경언의 야구는 어느 정도 괴짜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잃고서도 안타를 만드는 모습들로 팬들의 인기를 얻었다. 허리가 빠지고도, 한 손을 놓고서도 안타를 쳤다. 지도자들은 그의 폼을 싫어했다. 김경언은 “타격코치가 10명이라면 10명 모두가 폼을 바꾸려 했다”고 말했다.

고유한 타격폼을 지켜온 것도 도전이라면 도전이었다. 코치들이 만져준 폼으로 연습을 하다가도, 실제 경기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원래의 폼으로 되돌아갔다. “왜 바꾸지 않았느냐”고 묻자 “안 바꾼 게 아니라 못 바꾼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원래 그렇게 치는 놈은 계속 그렇게 쳐야 한다.

그 폼으로 김경언은 2015년 0.337을 쳤다. 당시 한화의 쇼다 고조(현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 타격코치는 “일본에서도 저렇게 치는 선수를 못 봤다”고 했다. ‘야신’ 김성근 감독도 “신기하다”고 했다. 3년 8억5000만원으로 FA 협상에서 사인한 뒤 거둔 성적이었다. 팬들은 ‘착한 FA’ ‘헐값 FA’라고 했다. 정작 김경언은 “나 정도면 많이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빠, 야구장 가요

그의 등번호 51번에도 엉뚱한 도전정신이 있다. 누군가가 “한화에서 성공한 51번 선수가 없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그럼 내가 달아보겠다”고 했다. 미국프로야구(MLB)에서 오래도록 활약하는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의 등번호를 따른 게 아니냐는 추측도 많았다. 둘은 같은 좌타자이며 준비 자세도 묘하게 비슷하다. 김경언은 “절대 아니다”며 손을 내젓는다. 그러면서도 “나도 50세까지 야구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 프로야구 리그를 노크한다. 에이전트를 통해 대만 리그, 미국프로야구 마이너리그를 접촉하고 있다. 그는 “협상도 필요 없다. 최저연봉으로도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겨울에 시즌이 시작되는 호주 리그에 도전할 생각도 있다. 그는 “야구를 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독특한 타격으로 성공할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지만, 그저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한다.

‘야구가 좋다’ 이외의 동력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아이들이 야구장 가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린 아들 둘과 딸이 크는 그의 집에서는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의 전광판이 보인다. 큰아들은 “이제 야구장 안 가냐”고 자꾸 묻는다. 김경언은 “아빠가 지금은 갈 수 없는데, 다음에 꼭 다시 같이 가자”고 말해준다 한다. 아내는 돈 걱정 말라며 그의 도전을 격려한다.

그는 2001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프로 15년차가 된 2015년에 비로소 야구가 즐거워졌다고 한다. 젊었던 시절에는 힘들기만 했다고 한다. 자기 폼으로 마음껏 스윙할 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가장 짜릿했던 타석을 꼽아 달라 하자 “2015년 4월 25일 SK 와이번스에게 끝내기 안타를 친 타석”이라고 답했다.

가장 후회되는 타석을 묻자 “안타를 못 친 모든 타석”이라고 했다. 혼잣말로 “얼른 다시 승부하고 싶다”고 했다.

대전=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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