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모의 Respect] 아르센 벵거, 더 높은 평가 받아 마땅한 명장

조회수 2018. 4. 21. 10:49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22년간 이끈 아스널을 떠나는 아르센 벵거.
박지성 - 이영표의 EPL 진출이 1년만 빨랐다면?
한국 팬들은 벵거의 전성기를 본 적이 없다.
아르센 벵거, 더 높은 평가 받아 마땅한 명장.
2004년, 1군 팀이 최고의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시작된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건축 현장에서 환히 웃고 있는 아르센 벵거 감독. 현재 아스널이 쓰고 있는 홈구장의 건축은 이후 벵거 감독이 그라운드 위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르센 벵거가 아스널을 떠난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치 '아스널(Arsenal)=아르센(Arsene)', '아르센=아스널'처럼 하나의 '동음이의어'처럼 통용됐던 벵거의 아스널이 드디어 막을 내린다. 오늘 직접 아스널 현장에 다녀오고도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아르센 벵거 감독이 1996년부터 2018년까지 아스널을 이끌면서 남긴 업적, 그가 축구계에 가져온 혁신 등은 굳이 이 칼럼에서 하나하나 되풀이하지 않더라도 많은 언론의 보도로, 또 20년 이상 축적되어온 세월과 그 세월 동안 오간 이야기들로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벵거 감독이 아스널을 떠나는 것을 기념하며 적는 이 칼럼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런 질문과 함께 시작해보면 어떨까? 

"혹시, 박지성과 이영표의 EPL 진출이 1년, 혹은 2년 빨랐다면 어땠을까?" 

1. 한국의 축구팬들은 벵거의 전성기를 본 적이 없다

시계추를 과거로 돌려보자.

한국에서 EPL이 대대적으로 방송되며 모두가 즐기는(일부 매니아만이 아닌) 스포츠 콘텐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박지성과 이영표가 EPL로 진출한 시점, 즉,  2005년부터였다. (물론,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국내에서도 유럽 축구가 방송됐지만 박지성과 이영표의 진출 시점에 비할 수는 없다)

그렇게 EPL이 한국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새벽에도 박지성 이영표의 경기를 기다리게 만들었던 2005년은 한국의 관점이 아닌 EPL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주 커다란 변혁이 있었던 해였다.

2003년 첼시를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의 천문학적인 자금과 '스페셜원' 무리뉴 감독의 만남 속에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됐던 퍼거슨의 맨유 대 벵거의 아스널의 '양강체제'가 깨지고 첼시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시점이 바로 2005년이었던 것이다.  한국 팬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했을 당시(퍼거슨 감독 재임 당시 '영원한 우승후보'였던) EPL의 최강자는 첼시(혹은 무리뉴 감독)였고, 이후 EPL은 그런 첼시와, 왕좌를 되찾으려는 퍼거슨의 맨유의 경쟁으로 흘러간다. 

한편, 이번 칼럼의 주인공인 아르센 벵거 감독이 이끄는 아스널은 바로 그 2005년을 전후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1997/98시즌 퍼거슨의 맨유를 꺾고 '더블'(리그 + FA컵)을 달성한 후 잠시 주춤했다가 200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아스널은 2003/04시즌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120년 가량 나온 적이 없는 무패우승을 기록하며 그 정점을 찍은 후 아스널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신축을 위해 긴축재정에 돌입하면서 스타들을 떠나보내고 점차 3, 4위를 맴도는 팀이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박지성, 이영표의 EPL 입단 이후 프리미어리그를 접하게 된 대다수 한국의 축구팬들은 아르센 벵거의 전성기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본 적이 없다.

그저 지나간 과거의 영광 혹은 향수처럼 들었을 뿐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EPL을 처음 접하면서부터 이미 하락세에 접어든 아스널을 봤고, 과거의 영광은 화려하지만 그 영광을 되풀이하지 못하는 아르센 벵거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만약, 박지성과 이영표의 EPL 진출이 1년 만 더 빨랐다면(그러니까 아스널이 무패우승을 달성한 2004년이었다면), 혹은 2년 만 더 빨랐다면(아스널이 무패우승의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던 2003년이었다면) 아르센 벵거라는 감독에 대한 우리 한국 팬들의 시각과 평가도 지금과는 아주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벵거가 아스널을 떠난다는 소식을 다루고 있는 가디언. 

2.'벵거가 남긴 최대의 유산'을 우리는 매주 즐기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환경적인 요소를 근거로, 나는 아르센 벵거 감독이 국내에서 과소평가 받아온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박지성과 이영표가 EPL에 입성했던 바로 그 시점에 리그 챔피언이었던 첼시의 무리뉴 감독이 국내에서 유독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에도(실례로, 무리뉴의 리더십에 대해 다룬 '무리뉴, 그 남자의 기술'이라는 책이 축구 서적 중에선 드물게 전체 베스트셀러 랭킹에 들기도 했다) 얼마간 바로 그런 환경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 축구팬들 대다수와 EPL의 '첫 만남' 당시, 무리뉴 감독은 젊고 당찬 떠오르는 별이었고, 벵거 감독은 이미 전성기를 지나 하락세에 접어든 감독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아르센 벵거라는 감독의 22년 재임 기간 중, 그가 리그를 완벽하게 독주하고 있던 퍼거슨의 맨유를 꺾고 EPL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1998년의 모습도, 무패우승을 달성했던 2004년의 모습도 온전히 보지 못했다. 우리가 벵거 감독과 아스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는 일이 잦은 근간에는 얼마간 그런 이유도 들어있을지 모른다.

익히 알려진대로, 벵거 감독은 1996년 일본에서의 감독 생활을 마친 후 아스널 감독에 부임한 후 하나의 축구 클럽이 운영되는 방식(식습관, 스카우팅 시스템, 훈련방식 등등), 그리고 당시까지의 잉글랜드 축구계의 판도(맨유 독주에서 맨유 대 아스널의 양강체제로)를 바꿔놨다.

그리고 벵거 감독은 그 어떤 것보다도 지금 현재의 우리가 늘 즐기고 있는, EPL을 즐기는 세계 모든 축구팬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위대한 유산을 남긴 존재다.

EPL에 외국 감독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주인공이 다름 아닌 아르센 벵거였다는 점에서다. 

오늘날 EPL이 그 배경이 되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리그로 발전한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르센 벵거 감독이 아스널에서 거둔 성공을 시작으로 EPL의 수많은 클럽들이 '해외파'(여기서 말하는 해외파란 영국 연합 이외의 국가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스코틀랜드 출신인 퍼거슨 감독은 제외한다) 감독을 영입하면서 유럽 대륙의 감독들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축구 철학이 EPL위에서 구현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EPL의 역사에서 퍼거슨, 벵거의 뒤를 이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무리뉴 감독, 리버풀을 이끌며 전자의 세 사람과 함께 '빅4' 시대를 열었던 베니테즈 감독, 또 그 후에 EPL에서 성공을 거둔 모든 비영국인 출신의 감독들이 그 부분에서 아르센 벵거의 덕을 봤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는 지금도 매주 EPL 위에서 바로 그 결과물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21일자 신문에서 벵거 감독을 전체 1면에 소개한 인디펜던트. 아르센 벵거에 대해 '잉글랜드 축구를 바꾼 남자'라고 소개했다. 

3.  아르센 벵거, 더 높은 평가 마땅한 '명장'

아르센 벵거 감독에 대한 비판은 특히 그의 재임기간 막바지에(특히 지난 시즌 전후) 생겨난 측면이 강하다. 많은 팬들의 비판대로 벵거 감독은 어쩌면 아스널에서 조금은 너무 오래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이 시즌 후에 아스널을 떠나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재평가를 받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노팅엄 포레스트를 이끌고 2년 연속 유로피언컵 우승을 이끌었던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이 감독 경력 마지막 경기에서 팀이 강등을 당했다는 비극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노팅엄 포레스트 감독은 그 마지막 경기에서 강등이 확정된 가운데도 클러프 감독의 이름을 부르며 박수를 보냈다) 지금은 모두가 그의 위대한 업적만을 기리고 노래하는 것처럼.

아르센 벵거의 업적 역시 시간이 가면서 재평가 되고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중소규모의 클럽을 이끌고 좋은 성적을 낸 감독들에게 기꺼이 '명장'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이를테면 에버튼 시절의 모예스 감독처럼), 정작 정말 위대한 감독들에겐 오히려 '명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갑론을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이를테면 아스널의 벵거, 현 맨유의 무리뉴, 현 맨시티의 과르디올라 등등).

한 팀을 이끌고 그 팀에 단순히 우승 트로피만이 아닌 철학과 개성, 그리고 위대한 역사와 유산을 남기고 퇴장하는 아르센 벵거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 '명장'이었다.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