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이대호와 한기주, 10년의 드라마

조회수 2018. 4. 19. 09: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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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와 한기주가 오랜 기간을 잇는 드라마 같은 인연을 보이고 있다.              MBC Sports+ 화면

시간을 꽤 거슬러야 한다. 10년도 넘는 오래된 기억이다. 정확하게 2007년 7월의 일이다. 상영관은 역시 전국 최고의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사직 극장이었다.

당시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프로그램이 있다. 이 동영상은 여전히 유튜브를 비롯한 SNS와 각종 커뮤니티를 떠돌고 있다. MBC ESPN(MBC Sports+)가 원 제작자다.

먼저 말끔한 양복 차림의 조범현 전 기아 감독이 화면에 등장한다. “사실 (한)기주가 등판 간격이 좀 불규칙적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날도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등판한 것인데….” 이윽고 다시 야구장 씬이다. 롯데 타자 2명이 연달아 쓰러진다. 투수의 공에 각각 허벅지와 옆구리를 강타당했다.

그 때만해도 미안하다며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마련되기 전이었다. 투수는 뻣뻣함 그대로다. 당한 타자만 날카로워졌다. 배트를 집어던지고, 째려보는 동작이 이어졌다. 그라운드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관중석의 홈 팀 팬들도 싸~해졌다.

다시 스튜디오 컷으로 넘어온다. 검은 양복에 앳된 이대호가 화면에 등장했다. “앞에 두 타자가 연속으로 공을 맞아가지고 심기가 좀 불편했는데, 우연찮게 기주의 공이 빠져서 머리 쪽으로 왔는데, 일단 피하기보다는 이기기 위해서 들어갔고, 그런 표정이 화면에 비쳤기 때문에…. 그 공을 피하지 않고 노려봤다는 게 팬들의 기억에 남은 것 같아요.”

얼굴을 향한 153㎞, 피하지 않고 째려봄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5-1로 롯데가 앞서던 8회였다. 원정 팀 기아에서는 한기주를 마운드에 올렸다. 패전처리인 셈이다. 당시만해도 조범현 감독과 사이가 별로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다. 때문에 등판하자마자 2타자를 연달아 맞힌 것도 자기네 벤치를 향한 일종의 불만 섞인 태업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그런 투수의 초구가 이대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시속 153㎞의 빠르기였다. 그런데 타자는 피하기는 커녕 꿈쩍도 않고, 한기주를 쏘아봤다. 그리고 카운트 2-2에서 가운데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받아쳐 가운데 담장 너머로 날려보냈다. 9-1로 승부에 쐐기를 박는 만루홈런이었다.

2007년 째려보기에 이어 만루홈런을 기록하는 장면.                                                               MBC ESPN 화면 캡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타이거즈 동료를 비롯한 관련자들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기 싸움에서 졌다는 거죠. 순진하게 야구를 하면 절대 안돼요. 한 대 더 맞힌다는 생각으로 기주가 던졌다면 홈런은 안 맞았을 거예요. 기주도 순진한 것 같고….” (이종범)

“대호 형이 겁이 없는 것 같았어요. 다른 타자들이었으면 치기 쉽지 않았을텐데 오히려 더 들어와서 바깥쪽을 공략했잖아요. 투수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윤석민)

“직구를 노리고 있었는데 슬라이더가 흘렀고, 워낙 볼이 빠른 친구라서 슬라이더도 같은 타이밍에 맞은 게 좋은 타구가 나온 것 같아요.” (이대호)

어젯밤, 또다시 사직 극장

12회 초 1점을 잃었다. 6-6의 균형이 깨졌다. 치명적이었다. 이 경기마저 놓치면 홈 팀의 나락은 끝이 안 보일 것이다.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이다. 12회 말 선두타자 문규현이 중견수 앞 안타로 불씨를 피웠다. 다음 타자 이병규는 소득이 없었다. 플라이 볼을 띄워 아웃 카운트만 1개 늘렸다. 이제 믿을 건 중심 타선이다. 3번 손아섭이 팬들의 환호에 호응했다. 좌익수 쪽 클린 히트가 연결됐다.

1사 1, 2루가 되자 원정 팀이 급해졌다. 타임을 불러 흐름을 끊었다. 투수 코치는 부랴부랴 마운드 미팅을 주선했다. 심각해진 표정으로 투수와 포수를 다독였다.

그런데 우연일까? 하필이면 이 경기도 MBC Sports+가 중계했다. 2007년 광주 때처럼 말이다.

카메라는 대기 타석을 줌인했다. 그 때보다 한층 더 몸집이 좋아진 타자가 빈 스윙으로 감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입 모양이었다.

대기 타석을 비추는 중계 화면. 미묘한 상황이 되자 살짝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MBC Sports+ 화면

하긴 그리 오래 전 기억까지 더듬을 필요없다. 바로 전날(17일) 밤도 생생하다. 7회 3점 홈런도 지금 마운드에 있는 투수를 상대로 뽑아낸 것이었다. 중계팀의 스틸 컷이 등장했다. 모자 벗고 땀을 닦는 투수, 그 뒤로 베이스를 일주하는 타자의 모습이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2007년 다큐멘터리의 두 주인공은 다시 한번 운명처럼 맞닥뜨렸다. 스코어 6-7, 1사 1, 2루였다.

극도로 신중한 슬라이더 2개가 연속으로 들어왔다. 볼 1개, 커다란 헛스윙 1개였다. 카운트 1-1에서 강민호의 3구째 선택도 같았다. 연속 3개째 슬라이더였다. 바깥쪽 낮은 코스로 땅볼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127㎞짜리가 타자 몸쪽으로 향했다. 실투였다. 하지만 치기 쉬운 공은 절대 아니었다. (몸에 맞을까봐) 움찔하면 타이밍을 놓치지 십상인 코스였다. 게다가 바짝 붙은 볼이었다. 그런데 타자는 이번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짧은 백스윙으로 공과 배트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마치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짧은 팔’로 임팩트가 가해졌다.

분명 불완전한 스윙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기술적이었다. 타구는 의외의 비거리를 냈다. 쫓아가던 외야수들이 펜스 너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함성과 비명, 팬들의 외침이 사직 구장을 뒤덮었다. 사이키 조명이 현란하게 시야를 어지럽혔다. 주인공 한 명은 담담하게 달리고 있었다. 마치 어젯밤, 그리고 11년 전 그날의 모습이 되풀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한 명. 회한이 남는 듯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자꾸 타구 지점을 바라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또 한번의 악몽일 것이다.

끝내기 순간 한기주는 믿을 수 없다는듯한 표정이었다.                                                        MBC Sports+ 화면

그는 스스로 천만 관객 배우라고 자랑한다. 없는 얘기가 아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해운대>에 카메오로 출연한 탓이다. 당시도 제법 실감나는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맞붙는 씬의 상대가 당대 최고의 배우 설경구였다. 어디 그 뿐인가. ‘조선의 4번 타자’라는 별명도 그렇다. 영화 YMCA 야구단이 주는 연상 작용 덕분에 얻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흥행을 부르는 피를 타고난 것 같다. 상대 배우가 바뀔 뿐, 늘 엄청난 화제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오재원과 함께, 때로는 이름 모를 치킨 박스의 주인과도 흥행 대작을 찍는다.

어제(18일) 경기는 사실 그만을 위한 시나리오였다. 8회 극적인 동점 3점 홈런, 그리고 12회 훨씬 더 극적인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이었다. 게다가 무려 10년짜리 스토리까지 포함된 연재물이었다. 이제는 어쩌면 전담 작가가 필요할 지 모르겠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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