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BK와 흑마법에 걸린 다저스, 그리고 류현진

조회수 2018. 4. 4. 08: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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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이 코 앞이다. 홈 팀 덕아웃 쪽에서 누군가 느릿한 걸음으로 마운드를 향한다. 무릎 부근이 찢어진 고풍스러운 느낌의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 안에 만만치 않은 허벅지 굵기는 예전에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 지를 짐작케했다.

그로부터 몇 분전 기자회견장이었다. 시구자를 두고 이렇게 많은 보도진이 모인 건 오랜만이다. 그만큼 로컬에서도 화제성이 큰 인물이었다.

궁금한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예전처럼 잠수함 동작으로 시구할 건가요?”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왼손으로 할 거예요.” 장내에 웃음이 터졌다. 통역이 재차 확인했다. “진짜루요?” 그제서야 답변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다시 한번 기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실제 시구는 오버핸드로 이뤄졌다. 과거의 화려했던 용틀임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래도 관중석에서는 갈채가 터졌다. 주인공은 너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이벤트 내내 환한 얼굴이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 오래된 추억과 벅차게 마주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 때만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의 해맑고, 천연덕스러운 미소가 원정 팀과 관계자들에게는 어떤 재앙(?)으로 다가올 지. (물론 늘 그렇듯이 어디까지나 ‘구라다’. 웃자는 데 죽자고 정색하지 마시길. 그냥 즐기시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트위터 캡처

퇴근하지 못하는 기자들

기자회견장은 화기애애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이건 전혀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예전에는 미디어와 스킨십이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때로는 거칠고, 불편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하긴 그의 말마따나 “다 어렸을 때 일”들이다.

17년전 우승 멤버에 대한 첫번째 궁금증은 “얼마만에 애리조나에 와 본 것이냐”였다. “10년도 넘은 것 같다. 그동안 여유가 없어서 못 온 것 같다.”

다음 질문이 미묘한 부분을 건드렸다. “예전 우승 멤버들 중 연락이 닿는 친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의외로 솔직한 답을 내놨다. “참 아쉬운 부분이다. 너무 어려서 그 때는 (소중하다는 걸) 몰랐다.” 랜디 존슨하고도 연락하지 않느냐는 확인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 아저씨는 너무 무섭게 생겨서….” 다시 한번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마침 이날 경기장에서는 2001년의 주역들이 있었다. 현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중계방송 팀(Fox Sports Arizona)으로 활약하는 밥 브랜리(감독)와 마크 그레이스(1루수)였다. 기자들은 그들과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특히 그레이스는 어떤 선수로 기억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 때였다. 주인공이 슬며시 손가락 2개를 입에 대는 (담배) 시늉을 했다. 이날 프레스룸에서 가장 큰 폭소가 터졌다. 역시 손가락으로 하는 퍼포먼스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농담이예요. 그는 좋은 선수였어요.”

어떻게 알았는 지, 시구자의 근황에 대한 물음도 있었다. 미국에서 운영하는 일식 레스토랑에 대한 것이었다. “샌디에이고에 있는데 괜찮게 되고 있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한 답변이었다. 그런데 진도가 조금 더 나갔다. “야구 관련된 분들이 오시면 공짜로 드리겠다.” ‘공짜로’라는 단어가 몇번 더 강조됐다. 그리고 옆에 있던 통역은 이걸 조금 더 구체화시켰다. ‘미디어들도’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미국 기자들의 표정이 일거에 환해졌다. 비싼 일본 음식을 공짜로 주겠다는데, 왜 아니겠나. 그들이 김영란이라는 대법관을 알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너무 경솔했다. 그 순간에도 흑마법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회견장의 기자들은 아무도 퇴근할 수 없었다. 끝내기가 나온 시간이 12시 26분. 새벽까지 강도 높은 야근을 계속해야 했다. 경기 시간만 무려 5시간 46분이었다. 1998년 개장한 체이스필드 역사상 가장 긴 게임을 지켜봐야 했다.

9회 동점 홈런의 악몽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흑마법의 가장 큰 희생자는 따로 있다. 원정 팀의 마무리 투수다.

6-3의 우세 속에 열린 9회 말의 출발은 좋았다. 2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자 관중들은 귀가를 서둘렀다.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리기 전에 차 빼러 가야지.’

그런데 수상한 조짐이 시작됐다. 폴 골드슈미트, A.J. 폴락이 연이어 볼넷으로 출루했다. 그리고 다음 타자 크리스 오잉스의 초구 90.5마일짜리가 존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주차장에서 막 시동을 켜던 성미 급한 관중들이 잠시 얼어버릴 일이 생겼다. 체이스필드를 덮은 뚜껑이 들썩일 정도의 함성이 터진 것이다. 굳이 달려가지 않아도, 굳이 스마트폰을 켜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5시간 46분짜리 역전패의 서막이 된 한 방이었다. 그건 마치 주문에 걸린 듯 17년 전 기억을 강렬하게 소환시켰다. 그라운드에 주저앉은 마무리 투수, 천천히 베이스를 도는 티노 마르티네스(4차전)와 스캇 브로셔스(5차전). 마운드에 오른 밥 브랜리 감독의 외침. “고개 들어(Put your head up).”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처럼 되풀이되는 악몽이었다.

작년 9월까지만 해도 다저스가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를 보유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었다. 그러나 월드시리즈를 거치며 명성에 흠집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번 시즌도 개막 초반 연이어 오욕을 뒤집어 쓰고 있다. 지난 주 샌프란시스코전에 이어, 애리조나에서도 9회의 악몽은 되풀이 되고 있다. 일단 볼 스피드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는 실정이다.

2001년 월드시리즈 때 모습(왼쪽)과 3일 켄리 잰슨이 홈런 타구를 쳐다보는 장면. 사진 = 게티 이미지 제공, mlb.tv 화면 캡처

텔레파시로 통하는 사이(?)

음모론의 시각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 홈 팀의 깜짝 시구자는 어쩌면 기획된 것일 지 모른다. 원정 팀 선발의 출신지에 착안해서 말이다.

물론 그가 방울뱀을 질색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날 실패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특이한 패턴 때문이다. 안타를 많이 맞고, 점수를 주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볼넷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스타일이다.

이날은 특히나 납득하기 어려웠다. 4회도 되기 전에 벌써 5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2점째를 잃던 3회는 더욱 기가 막혔다. 3루타와 4구 2개로 2사 만루 위기를 자초했다. 여기서 제이크 램을 맞았다. 크게 두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스트라이크를 1개도 못 던졌다. 내리 4개의 볼로 밀어내기를 허용한 것이다. ML 진출 후 밀어내기는 작년 6월에 한 차례 있었을 뿐이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도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본래 그런 투수가 아닌데 한 이닝에 3개씩이나 볼넷을 내줬다. 그러면 이 구장에서는 극복하기 어려워진다.” 본인은 오죽 당황스러웠겠나.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너무 어렵게 승부하려다 보니 갑자기 제구가 안 됐다. 3점을 이기고 출발했는데, 선발 투수로 역할을 못해서 아쉬움이 크다.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

깜짝 시구자는 이날 경기전 기자들과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눴다. 류현진과 친정팀 다이아몬드백스 중에 누굴 응원하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건 무척 곤란한 질문이다. 그래도 친정팀 애리조나가 이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후배와의 친분에 대해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텔레파시로 통하는 사이죠”라고.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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