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 출신 탈북 장애인, 태극마크 달고 '인생 2막'

박민지 기자 입력 2018. 3. 2. 05:02 수정 2018. 3. 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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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패럴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 최광혁
평창패럴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 최광혁 선수가 1일 경기도 부천 도당근린공원에서 인터뷰 중 결연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부천=최현규 기자
평창 동계패럴림픽에 출전하는 아이스슬레지하키 최광혁 선수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질주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최 선수가 최근 한 경기 시작 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 최광혁 선수 제공

그는 꽃제비였다. 제비가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듯 북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그는 장애인이다. 밥값을 벌려고 몰래 탄 기차에서 떨어져 마취도 없이 다리를 절단했다. 이제 탈북민이라 불린다. "아빠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낯선 브로커 손에 이끌려 열네 살 때 한국에 왔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좌절을 겪으며 할 수 있는 건 견디는 일뿐이었다.

'죽어도 그만'이란 생각에 국경을 건넜다는 그가 곧 세계인이 지켜볼 무대에 선다. 평창 동계패럴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 최광혁(31). 1일 경기도 부천 도당근린공원에서 만난 최 선수는 편안해 보였다. 꽃제비·탈북민·장애인이란 수식어를 '태극전사'로 바꿔냈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오른손엔 하키 채를 들었다. 이제 금메달을 목에 걸 차례다.

동네서 알아주던 ‘꽃제비’

최 선수는 1987년 함경북도 화성의 쓰러져가는 집에서 태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찢어지는 가난과 그것이 부른 불화였다. 가족은 함께 살 수 없었다. 일곱 살 때 김일성이 죽었고 이듬해 ‘고난의 행군’ 식량난이 시작됐다. 부모는 이혼해 각자 탈북 길에 올랐다. 돌봐주던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아홉 살 때 구걸을 시작했다. 함께 동냥하던 여동생은 단속에 걸려 잡혀간 뒤 소식이 끊겼다. 정말 혼자가 됐다.

혈혈단신 꽃제비 생활에 이골이 난 몇 년 후 아이스크림 장사에 나섰다. 함북 청진역을 무대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1원50전에 사다 기차에서 5원에 팔았다. 기차가 정차하면 그 틈에 몰래 올라타 객실을 돌았다. 꽤 쏠쏠했고 꿈도 생겼다. 이렇게 벌다보면 엄마 아빠를 찾고 동생도 만날 거라 믿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 5월 기차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다가 내릴 타이밍을 놓쳤다. 기차는 이미 속도를 한껏 높였고 그는 엉겁결에 뛰어내렸다. 왼발이 바퀴에 깔려 뭉개진 탓에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다. 최 선수는 “마취도 없이 수술을 받다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왼쪽 다리가 없더라”고 했다. 다시 꽃제비 생활이 시작됐다. 방공호 같은 데서 지내며 너무 추울 땐 기름 찌꺼기를 구해 불을 피웠다. 그의 다리를 앗아간 기차 바퀴에 윤활유로 쓰는 거였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돈도, 가족도, 발목도 없는 그에겐 희망도 없었다. 그때 한 브로커가 접근해 “한국에서 아빠가 기다린다”고 했다. 당시 함경도에는 부모 없는 아이를 데려다 장기를 떼어내 판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래도 따라갔다. ‘죽어도 그만’이었다.

브로커와 함께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머무는 2주 동안 ‘정말 아빠가 날 찾고 있나’ 희망을 품었다가 ‘그럴 리 없지’ 단념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2001년 8월 마침내 밟은 한국 땅에 정말 아버지가 있었다. 브로커는 먼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 있던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얘가 함경도에선 ‘알아주는’ 꽃제비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다리를 잃어가며 겪었던 고초가 역설적으로 가족을 찾아준 셈이었다.


남녘 ‘학교’에 가다

한국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자 고민도 않고 “문화”라고 말했다. 거의 모든 게 힘들었다는 뜻이다. 또래 아이 중에는 그를 도깨비쯤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머리의 뿔을 보여 달라는 말도 들어봤다.

그는 너무 어려서 다리를 잃었다. 절단된 부위에서 뼈가 자라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일반학교를 다녔지만 무리였다. 치료 때문에 결석이 잦아지자 학교에서 유급을 권했다. 그건 견딜 수 있었는데 문제는 시선이었다. 당시 그는 ‘장애’에 불만이 많았다. 세상 탓, 부모 탓을 했다. 장애 그리고 북한 태생임을 알리기 싫었다. 다른 이가 “모른다” 말하면 “모르는구나” 할 것을 그가 “모른다” 하면 “북한사람이라 모르는구나” 했다.

그러다 이주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알게 됐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들어간 학교. 그곳 관계자들은 상처 난 마음을 보듬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생활에 약점이 될 ‘발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약점을 인정하라”고 주문했고 그는 잘 따랐다. 피해의식을 떨쳐내니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최 선수는 한국에 와서 이룬 모든 것을 여명학교의 공으로 돌렸다. 그 시절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엔 덤덤히 답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시간이 약이더라고요.”

빙판서 열어가는 인생 2막

세 번의 수술 끝에 의족(義足)을 했다. 여명학교를 거쳐 2011년 한국복지대학교 의료보장구학과에 입학한 뒤 교직원의 권유로 아이스슬레지하키를 처음 접했다. ‘아이스하키’와 썰매를 뜻하는 ‘슬레지’의 합성어로 썰매에 앉아 하키를 하는 것이다. 한쪽 발목이 없지만 운동신경은 놀라웠다. 하키는 곧 그의 전부가 됐다. 주말도 없이 2년을 꼬박 매달려 2014년 장애인 클럽팀 선수가 됐고 2016년 말 강원도청 실업팀에 입단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다.

아이스슬레지하키 대표팀은 1·2·3조로 나뉘어 있다. 1조가 주전, 2·3조는 후보다. 그는 3조에 속해 있다. 이 종목은 메달 확률이 높다. 노르웨이 등 강팀이 출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한국 대표팀 실력이 워낙 뛰어나다. 현재 그의 꿈은 평창에서 원 없이 뛰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딱히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하키는 어릴 적 잃은 엄마 같고 터전을 마련해준 새 조국과도 같다. 최 선수는 “고난과 아픔의 크기를 말할 순 없겠지만 내 경우 큰 자산이 된 건 분명하다. 적어도 두려움에 갇혀 걱정을 앞세우진 않는다”고 말했다.

꽃제비 시절 헤어진 여동생도 탈북에 성공해 지금 한국에 와 있다. 북한의 고아원에서 지내다 곡절 끝에 국경을 넘었다. 훈련 중 짬날 때마다 부천의 동생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곤 한다. 가족의 응원 속에 최 선수는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고 있다. 후원하는 단체도 생겼다. 사회복지법인 따뜻한 동행은 그의 다리가 돼줄 '스포츠 의족'을 지원했다. 평창이 끝나면 베이징 패럴림픽을 위해 또 도전할 것이다. 썰매에 앉아 링크를 누비다 보면 체력적으로 고비가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하는 혼잣말이 있다고 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전에 그랬듯이 나는 또 해내겠지.”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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