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김보름 선수, 고개 들어요. 죽을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남정훈 입력 2018.02.25. 07:33 수정 2018.02.2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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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외출은커녕 선수촌 식당에 가는 것도 두려웠다. 밥 안 먹겠다는 것을 대표팀 남자 동료가 억지로 끌고가기도 했다. 아무 것도 삼킬 수 없을 만큼의 고통스런 사흘이었다. 사흘간 밤새 잠도 설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트랙 위에 설 힘도 없었지만, 그녀는 스케이트 끈을 다시 조여 맸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트랙 위에서 그간 자신이 흘려온 땀의 결실을 맺는 것뿐이었으니까.

몸은 물론 마음 상태도 최악이었음에도 시상대 두 번째 높은 자리에 섰다. 그녀가 그간 갈고 닦아 온 기량이 얼마나 수준급이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최상의 컨디션으로 출전했다면 금메달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경기 뒤 관계자들이 “컨디션만 좋았다면 금메달도 가능했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여자 팀추월에서 ‘왕따 논란’에 휩싸였던 스피드스케이팅의 김보름(25)이 자신의 주종목인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이상화(29)에 이어 한국 빙속 여자 선수로는 두 번째로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김보름은 24일 강릉 오벌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8분32초99의 기록으로 다카기 나나(일본·8분32초87)보다 0.12초 늦게 결승선을 통과하며 포인트 40점을 얻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4일 오후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결승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보름이 시상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인성 논란’에 ‘왕따 가해자’로 낙인찍혔던 김보름

김보름은 지난 19일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에서 ‘왕따 논란’에 휩싸이며 마음 고생을 했다. 당시 레이스 막판 김보름과 박지우(20)는 가장 뒤에서 달리던 노선영(29)과 4초 이상 앞선 채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이를 두고 일부 국민들은 ‘김보름과 박지우를 망신주기 위해 노선영과 맞추지 않고 일찍 들어왔다’며 ‘왕따설’을 제기했다. 여기에다 김보름이 경기 뒤 가진 방송 인터뷰에서 노선영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뒤에 조금 우리와 격차가 벌어지면서 기록이 아쉽게 나왔다”고 말하며 노선영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인터뷰를 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엔 피식 웃는 듯하게 보이면서 ‘인성 논란’까지 일었다.

순식간에 김보름에 대한 기사에는 악성댓글 수만개가 달라붙었다. 급기야 청와대 국민청원엔 김보름과 박지우의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라는 게시글이 올라왔고, 이에 서명한 국민의 수가 60만명에 육박했다.

논란이 커지자 김보름은 백철기 감독과 이튿날인 20일 기자회견을 열어 눈물로 사과의 뜻을 전했지만, 국민들은 이를 두고 ‘거짓 사과’, ‘거짓 눈물’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여론은 쉬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기에 20일 몸살로 갑작스레 기자회견에 불참한 노선영이 한 특정 언론사와의 인터뷰로 백 감독의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백 감독의 해명을 또 다시 재반박하면서 김보름에 대한 비난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마치 빙상연맹의 행정착오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될 뻔 했다 가까스로 출전 기회를 얻은 노선영은 ‘절대선’, 김보름은 ‘절대악’으로 보는 듯 했다. 심지어 21일 치러진 팀추월 7~8위 결정전에선 한국 관중들이 노선영의 이름엔 환호하면서도 김보름이 호명될 땐 싸늘한 반응과 야유까지 보냈다.

심신이 피폐 해질대로 피폐해지고, 홈이 홈이 아니게 됐지만, 김보름은 마음을 다 잡고 훈련에 집중했다.

◆ 은메달과 눈물로 국민들께 올린 큰절, 그녀의 사죄는 진심이었다

3년 아니 30년만큼 길게 느껴진 사흘 뒤 열린 24일 매스스타트. 3일 전만 해도 야유가 나왔지만, 이날 강릉 오벌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했다. 김보름이 몸을 풀며 앞을 지나갈 때면 환호와 응원이 터져나왔다. “김보름 파이팅”이란 외침도 나왔고, ‘김보름, 너를 응원해’, ‘김보름 우리가 있잖아’ 등의 응원 플래카드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준결승에서 체력을 비축하며 6위로 결승에 진출한 김보름은 레이스 초반 체력을 비축하며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10바퀴째부터 슬슬 스피드를 올리며 한 둘을 제치기 시작했고, 13바퀴째엔 5위까지 뛰어오르며 본격적인 메달 경쟁에 나섰다. 14퀴째에 4위, 15바퀴째에 3위까지 뛰어올랐다. 김보름의 역주가 계속 될 때마다 오벌을 찾은 관중들은 큰 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이번 평창에서 김보름이 처음으로 홈다운 홈에서 뛰는 레이스였다. 관중들의 응원에 힘을 얻은 김보름은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2위로 달리던 이레인 슈텐(네덜란드)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고, 결승선 직전 날을 들이밀려 사진 판독 끝에 은메달을 확정했다. 3위 슈텐과는 단 0.03초차였다.

은메달이 확정되자 김보름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태극기를 들고 빙판을 돌면서 관중석을 큰 절을 올리며 또 다시 사죄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은메달과 큰절로 한 그녀의 사과와 속죄는 진심이었다. 시상대 위에서도 그녀는 웃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평창에서 시상대에서 웃음을 보이지 못한 선수는 김보름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평생 한 번 꿈꾸기도 힘든 은메달이지만, 김보름에겐 이 은메달이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었던 김보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믹스드존(공동취재구역)으로 나온 김보름의 두 눈은 부어있었다. 경기 뒤 흘린 눈물 때문이었다. 취재진 앞에 선 김보름은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은메달 획득 소감을 묻는 말에도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큰 절의 의미에 대해선 “죄송한 마음이 커서 국민께 사죄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관중들의 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고도 한참을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뗀 김보름은 “그래도 응원 소리가 들려 힘이 됐다. 응원 덕에 잘 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 이어진 인터뷰 내내 김보름은 마치 대역죄인마냥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마이크를 썼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기어들어갔다.

이어 열린 프레스 컨퍼런스(기자회견)에서도 김보름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죄송하다는 생각이었단다. 김보름은 “경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지금 제 머릿속에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여론은 바뀌기 시작했다.

여전히 김보름에 대해 비난하는 의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보름의 은메달을 박탈해달라”, “김보름에게 포상금을 지급하지 말라” 등의 글도 올라오긴 했다.

그러나 이번 은메달로 그에 대한 동정여론도 확실히 생겼다. “김보름 선수 국가대표 박탈 반대, 악플 단 사람 처벌”, “김보름에 대한 마녀사냥 반대한다”, “우리들 자식같은 마음으로 다독거려 주시기를” 등등의 글도 올라왔다. 여기에 인터뷰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내용이 밝혀진 노선영에 대한 비판 청원, “노선영의 감성팔이에 속지말라”, “노선영의 거짓 폭로, 정확한 사실을 확인시켜 달라”, “노선영 선수 자격 박탈”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편, 23일 매스스타트 훈련 뒤 가진 믹스드존 인터뷰에서 “대회 뒤에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고 하던 노선영은 이날 깜짝 인터뷰를 예고했다. 이번 사건으로 파벌과 빙상연맹에 의한 피해자 위치에 서게 된 노선영을 내세워 여론몰이를 하려는 반(反)전명규 파의 구상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반(反)전명규 파가 한체대에서의 따로 훈련으로 ‘특혜’라고 문제 제기한 김보름과 이승훈이 이날 매스스타트에서 각각 은메달과 금메달을 따내면서 노선영의 인터뷰는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췄고, 노선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릉=남정훈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