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까불지마" 류현진의 새 구질 '투심'에 담긴 뜻

조회수 2018. 2. 23. 19: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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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겨울이 뜨겁다. 윈터리그의 열기 탓이다. 파릇파릇한 신출내기의 눈빛들이 반짝거린다. 그 중에도 유독 강렬한 레이저가 뿜어져나오는 곳이 있다. 마운드였다.

1사 1, 2루. 타석에는 상대팀 중심 타자가 버티고 있다. 90마일 중반대의 총알 2방이 연속으로 존을 벗어났다. 카운트는 2-0이 됐다. 그러나 불리해질수록 투수의 전투력은 불타오른다. 100와트짜리 이글아이가 타석을 녹여버릴 기세다.

그 때였다. 누군가 타임을 외쳤다. 수비 쪽이었다. 코치가 걸어나온다. 터벅터벅. 마운드에 올라갔다. 투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거리더니 이렇게 속삭인다. “이봐, 저 친구 삼진으로 잡아버리고 싶지? 그럴 필요 없어. 그냥 하나 줘. 그거 있잖아. 어제 연습한 거. 그걸로 낮고, 가볍게….”

잠시 후. 3구째가 들어갔다. 타자의 배트가 힘껏 돌았다. 맹렬한 강습 타구가 뿜어져나왔다. 공은 유격수 다리 사이를 뚫고 나갔다. 강습 안타? 실책? 어쨌든 결국 실점하고 말았다.

코치의 작전 타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장면은 27년 뒤 다시 한번 주목을 끈다. 당시 그 투수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2014년)였다.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어요. 어떻게 던져야 하는 지를 처음 깨달은 때였거든요.”

1987년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의 투수는 21살짜리 그렉 매덕스다. 타석에서 유격수 앞으로 강한 땅볼을 쳤던 타자는 세실 필더, 그리고 마운드에 올라갔던 사람은 시카고 컵스의 투수코치 딕 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온 ‘어제 연습한 그 공’, 그건 바로 교수님을 명예의 전당으로 안내한 불후의 명품 ‘싱커(투심)’다.

                                                                            사진 = 게티이미지 제공

매 교수를 전당으로 모신 바로 그 공

베네수엘라 윈터 리그까지는 그저 그런 유망주에 불과했다. ML 2년째(1987년) 성적이 30게임에 6승 14패였다(ERA 5.61). 그러나 딕 폴 코치를 만나며 세상이 달라졌다. 그의 가르침은 뚜렷했다. “삼진 잡으려면 최소한 3개는 던져야 한다. 그보다는 공 1개로 아웃 1개를 만드는 게 훨씬 능률적이다. 재수가 좋으면 아웃 2개도 시킬 수 있다.”

그걸 위해서 전수한 구질이 있다. 싱커다. 빠른 볼의 일종인데, 살짝 가라앉는 성질을 가졌다. 때문에 그라운드 볼을 유도하는 데 적절하다. ‘재수 좋으면 아웃 2개’를 가능케한다.

90마일 중반대였던 매 교수의 스피드는 90마일 정도로 떨어졌다. 대신 멀쩡한 볼끝은 없었다. 휘어지고, 꺾이고, 떨어지고…. 싱커를 던지기 시작한 1988년 이후로는 그런 말이 생겼다. “세상을 사는 데 정해진 것이라고는 세금과 죽음, 그리고 매덕스의 15승뿐이다.” (17시즌 연속을 기록하자 누군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명언을 패러디했다. 변종으로는 “세상을 사는데 정해진 것이라고는 세금과 죽음, 그리고 매덕스 앞의 땅볼은 아웃이라는 사실뿐이다”가 있다. 골드글러브 18번을 받은 필딩 능력을 찬양하는 표현이다.)

버리는 공은 없다. 어떤 카운트에서도 공격적이다. 여북하면 배리 본즈가 그런 말을 남겼다. “그렉(매덕스)이 파워 피처가 아니라고? 그는 투 스트라이크에서도 존 안으로 던진다. 그런 투수가 파워 피처가 아니면, 누가 파워 피처라는 말인가?”

전설적인 완투승 기록도 그의 손에서 완성됐다. 76개로 한 경기를 끝낸 경우도 있다(97년 컵스전). 100개 미만으로 9이닝을 마친 경우가 무려 28번이나 됐다.

                                                                                                 사진 = 게티이미지 제공

왼손잡이 매덕스로 불리는 카이클

싱커의 풀네임은 싱킹 패스트볼(singking fastball)이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분류하면 분명히 빠른 공의 일종이다. 잡는 법, 변하는 성질이 투심(two seam fastball)과 거의 흡사하다. 때문에 혼용/통칭되기도 한다. 매덕스의 공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누구는 싱커라고 주장하고, 누구는 투심이라고 우긴다. 정작 본인은? 그냥 ‘마이 패스트볼(my fastball)’이라고 한다.

이 공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로 추정한다. 초반에는 왜 떨어지는 지, 어떻게 떨어트리는 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냥 신의 축복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놀라운 효과를 경험한 이후로 수많은 싱커볼러가 등장했다. 오렐 허샤이저, 로이 할러데이, 케빈 브라운, 데릭 로우, 왕젠밍, 브랜든 웹….

이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매 교수’다. 그리고 그 적통을 잇는 현역으로는 잭 브리튼, 댈러스 카이틀 등이 꼽힌다. 특히 카이클의 경우는 볼 스피드나, 구종의 다양성에 비춰 ‘왼손잡이 매덕스’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공을 장착한 2015년 20승(8패) ERA 2.48로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커터,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만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투심이다(2017년 53.1%). 평균 구속 88.7마일로도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사진 = 게티이미지 제공

이번에도 카이클을 벤치마킹하는 류현진

미국물이 좋은가 보다. 몇 주전 인천공항을 떠날 때보다 턱선이 한층 날렵해졌다. 홀쭉해진 99번이 캐멀백 랜치 첫 날부터 불펜에 들어갔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그 장면에서 립서비스를 날렸다. “이맘 때 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은 지난 3년 중 처음이다.” 말이라고 하나? 수술받은 지가 3년째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어쨌든 듣기 좋은 얘기다. “여러 변수가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선발 기용을 생각하고 있다.” 싹싹하게도 벌써부터 인심을 쓴다.

눈길을 끄는 게 있다. 2~3차례 불펜 세션에서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투심을 많이 던진다는 사실이다. 본인도 의도적임을 인정한다. 취재진들이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생각보다 제구도 괜찮고, 변화도 있는 것 같아 계속해서 던질 생각이다.” 처음은 아니다. 작년 가을 포스트시즌에 팀을 따라다니면서 이 공을 연습삼아 던지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마도 카이클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시즌 때 구사하기 시작한 커터(컷 패스트볼)도 마찬가지였다. 턱수염 빼고는 비슷한 점이 많아서, 배워두면 여러모로 어울릴 것 같다.

물론 찬사도 있다. 구종 습득에 천재적이라는 칭찬이다. ‘동영상 몇 번 보고는 따라했더니 되더라’는 전설적인 얘기들도 떠돈다. 하지만 그렇게 달달한 얘깃거리만은 아니다. 본래 가졌던 직구로는 한계에 부딛혔다는 위기 의식이 먼저다.

수술 후 복귀에 성공한 것은 맞다. 그러나 2017시즌은 꽤 심각한 문제점도 노출시켰다. 패스트볼의 피안타율(.369)과 장타허용률(.720)이었다. 구종가치는 -21.3(fangraphs.com)으로 참담한 수준이었다. 한결같이 리그 최악의 수치였다. 결국 변화는 불가피했던 셈이다.

이유야 어떻든 본질은 같다. 야구는 투수 혼자 잘난 척 해봐야 별 볼일 없다. 이를 악물고, 가장 강한 공을, 가장 완벽한 코스에 던졌다 치자. 그래봐야 스트라이크 1개다. 차라리 타자가 치게 만들어서, 나머지는 뒤에 있는 야수들에게 맡기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이다.

21살의 매덕스는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에서 투심(싱커)을 배웠다. 그 때 깨달은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진 잡으려고) 까불지 마라. 아웃 2개가 낫다. (Don’t get cute, take the two outs.)”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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