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올림픽 개막식 인면조의 정체는 '가릉빈가'?

박은하 기자 2018. 2. 10.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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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SBS 올림픽 개막식 방송화면 캡처

“깜짝이야. 저거 대체 뭐죠?”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의외의 스타가 등장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새, ‘인면조’(人面鳥)가 그 주인공이다. 9일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개막식 공연은 강원도의 다섯 아이가 시간여행을 떠난다는 줄거리로 진행됐다. 백호를 등장시켜 한반도의 태고적 자연과 신화를 묘사하다 느닷없이 거대한 흰색 인면조가 나타났다. 인면조는 무표정한 얼굴로 깃털은 듬성듬성하고 뼈가 튀어나온 날개를 흐느적거리며 고구려 시대 복장의 무용수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 퇴장했다.

등장은 짧았지만 시청자들에게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인터넷에는 이 정체불명의 인면조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해외 방송사의 중계화면까지 뒤적거려 찾아낸 다양한 각도의 인면조 사진과 패러디 창작물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인면조의 얼굴을 미남으로 재창조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무시무시한 능력을 지닌 요괴로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 언뜻 서양의 드래곤과 비슷한 체형에 머리에 쓴 모자가 사극에 나오는 신료들을 연상시켜 ‘유교 드래곤’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말하길 볼수록 빠져든다는 이 생물체의 정체는 뭘까.

일본 방송사에서 찍은 인면조

인면조의 정체는 가릉빈가(迦陵頻伽)로 보인다.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어)의 칼라빈카(Kalavinka)를 한자로 옮긴 말이다. 고대 인도 신화와 불경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이다. 즉 유교 드래곤이 아니라 불교 설화의 생물인 것이다.

가릉빈가는 히말라야에 있는 설산에서 태어났다. 사람의 머리와 새의 몸통을 하고 있으며 자태와 소리가 모두 아름답다. 알에서 깨기 전부터 목소리를 낸다. 무시카라 불리는 일곱 개의 구멍이 달린 악기를 다룰 수 있는데 이 악기의 구멍마다, 또 계절마다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 ‘능엄경’ 1권에서는 가릉빈가를 두고 “그 소리가 사방세계에 두루 미친다”고 했다. ‘화엄경’에서는 “청정·미묘한 범음으로 무상한 정법(正法)을 연출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여 맑고 오묘한 도리를 얻는다”고 설명했다.

가릉빈가는 불사조이다. 천년을 살다 수명이 다하면 불을 피워놓고 악곡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주위를 돌다 불 속으로 뛰어든다. 불에 타 사라졌다가 재 속에서 다시 알로 부활한다.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킬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는 새이면서 생사의 순환을 보여주는 불멸의 새이다. 이런 속성으로 가릉빈가는 ‘부처의 말씀을 전하는 새’가 됐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 고분벽화에 묘사된 인면조, 원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 전승되는 괴물 새였으나 도교에 편입되면서 가릉빈가처럼 신성한 성격을 띠게 됐다.

히말라야에서 태어난 가릉빈가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인도 아대륙 바깥으로 퍼지면서 한반도까지 도달했다. 한반도의 문화유산 곳곳에서 기릉반가를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돌베개에서 출간된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를 보면 경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에는 상단 괴임대 8면에 각각 날개를 펼치고 악기를 연주하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전남 구례 연곡사 북부도의 탑신 8면 괴임에도 가릉빈가를 확인할 수 있다. 경북 영천 은해사 백흥암 불단에는 연꽃을 받쳐든 가릉빈가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조각 수법이 아름답고 채색이 뛰어나 국내 사찰의 가릉빈가 작품 중 걸작으로 꼽힌다. 경북 경주 분황사터 와당에도 그려진 것도 가릉빈가이다.

평안남도 강서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가릉빈가와 비슷한 인면조가 그러져 있다. ‘천추’와 ‘만세’라는 상상의 생물로 원래는 양 발톱에 뱀을 걸고 다니는 흉포한 괴물이나 도교에 편입되면서 길조로 변했다.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무덤의 주인을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변화된 성격이 가릉빈가와 비슷하다. 고구려 복장 무용수들을 생각하면 개막식 인면조는 이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다소 흉포해보이는 외관도 설명된다. 새를 숭배하는 신앙은 히말라야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퍼져 있었다. 주몽이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이 단적이다. 가릉빈가를 비롯한 ‘신성한 인면조’들은 고대인의 새 숭배와 불교 등이 융합된 결과로 보인다.

백호가 원래부터 이 땅에 있던 신성한 동물이라면 인면조는 외부에서 온 환상종이다. 인도와 네팔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상상력이 융합된 결과물이다. 평화 올림픽을 꿈꾸는 무대에 등장한 이 괴상한 새는 알고보면 동서문명 교류의 산물이자 고대 한반도의 문화 아이콘이었던 셈이다.

참고: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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