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맥] 그들이 묻습니다 "한국은 왜 한국을 깎아내리나요?"

임성일 기자 2017. 12. 1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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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안컵(EAFF E-1 풋볼 챔피언십) 대한민국과 일본의 축구경기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2017.12.16/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이 한국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뒤 한 일본 기자가 물었다. 그는 "이렇게 잘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한국대표팀을 깎아내리나요? 대표팀을 자극시켜 선수들의 정신력을 높이려는 의도인가요?"라고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냥 웃었다. 말문이 막힌 탓이다.

돌아보니 마치 동아시안컵 전체가 한국 축구를 향해 묻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한국 사회 전체를 향하는 화두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가운 시선, 냉정한 평가가 발전을 촉구하는 긍정의 채찍질이 되기도 하지만, 때리기만 한다고 무조건 잘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비난'만 많다는 비판이 적잖다.

지난 12일 한국과 북한의 2차전이 끝난 뒤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전한다. 남북전이 앞 경기로 펼쳐졌고 일본과 중국전이 이어서 오후 7시15분부터 진행됐다. 최종전에서 일본을 만나야할 한국 선수들은 전반전까지 이 경기를 지켜보고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을 떠났다. 그러나 신태용 감독은 끝까지 남아서 경기를 다 살폈다. 그 후반전 때 일화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3차전에서 중국을 상대할 북한대표팀의 욘 안데르센 감독도 VIP룸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안데르손 감독의 제안으로 신태용 감독이 합석하게 됐다. 안데르손 감독은 "솔직히 일본과의 1차전은 만족스러운 경기를 펼쳤다.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았고, 종료 직전 골을 내줘 패(0-1)했던 경기다. 그러나 한국전은 불만스럽다"면서 "한국의 빠르고 강한 압박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칭찬을 건넸다고 한다.

당시 안데르손 감독은 와인을 마시며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1-0으로 이기고도 표정이 좋지 않은 신 감독에게 "승리하고도 왜 그러느냐. 우승의 축배를 들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권했으나 신 감독은 그냥 손사래만 쳤다. 문화의 차이기도 하지만 마실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 무렵, 대표팀의 승전보를 받고도 한국 내 여론은 좋지 않았던 탓이다.

일본을 대파했을 때도 비슷했다. 할리호지치 일본 감독은 "오늘 경기는 모든 것에서 한국이 앞섰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이번 대회에 주전급 10명 정도가 빠졌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합류했다고 해도 오늘의 한국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극찬을 전했다. 대충 '축하한다' 정도로 그칠 수 있었겠지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16일 오후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안컵(EAFF E-1 풋볼 챔피언십) 대한민국과 일본의 축구경기에서 김신욱이 드리블을 하고 있다. 2017.12.16/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최대한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도 비아냥이 들렸다. "베스트 멤버도 아닌 팀을 꺾고 이렇게 자만하는 것도 우습다"는 댓글을 찾는 것은 어려운 노력을 요하지 않았다. 굳이 일반 팬들의 반응뿐이랴. 경기를 앞두고는 대회 해설을 맡은 축구인이 "지금 일본대표팀은 3진급"이라는 당황스러운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 축구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존의 이름값에 연연하지 말고, 국내파 해외파 구분 없이 실력 있는 이들을 대표팀에 불러 건강한 경쟁을 불러일으켜야한다"고 강조했던 인물이다. 또 "명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는 선수가 곧 대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 말이다. 그런데 일본이 유럽파를 부르지 않았다고 '3진' 운운했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제와서 심오한 의도가 있었다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축구계 후배들이 벼랑 끝 심정으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런 수준의 팀에게는 이겨도 그만, 지면 절망" 식의 판을 깐 것은 지금도 이해가 어렵다.

대표팀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일은 아니나 또 다른 일화도 있다. 한일전을 앞둔 전날(15일) 한국대표팀 훈련장에는 일본 기자들도 몇몇 있었다. 자연스레 한일 양국 기자들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러던 중 감바 오사카 소속의 황의조가 화두로 떠올랐다. 성남에서 뛰다 올 시즌을 앞두고 J리그에 진출한 선수다.

감바 오사카를 출입한다는 한 기자는 "황의조는 어떤 각도에서든 슈팅을 시도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면서 "일본 공격수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칭찬했다. 그 앞에서 별 생각 없이 "황의조의 슈팅력은 좋다. 하지만 결정력은 아쉽다"며 웃었다. 이후 대표팀 훈련을 지켜보다 머리가 '쿵'했다. 슈팅이 있어야 골도 있는 법인데, 황의조의 그 장점이 조롱거리가 될 게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일전에서 2골을 터뜨리는 등 총 3골로 대회 득점왕에 오르며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은 장신 스트라이커 김신욱은 "그동안 너무 답답했다. 지금껏 대표팀의 나는, 거의 대부분 지고 있던 상황에서 경기 막바지 교체로 필드를 밟았다. 난 그냥 롱볼을 헤딩으로 떨궈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신욱이 들어가면 단조롭다'는 비난을 받았으니 속 상했다"고 말한 뒤 "신태용 감독님이 죽어가던 날 살렸다. (김신욱의)머리만 보지 말고 발도 보라고 해줬고, 덕분에 동료들이 날 활용했다"고 달라질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무기도 폄하하기 바빠서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할리호지치 일본 감독은 "일본대표팀을 맡고서 가장 아쉬운 것은 훈련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다. 지금과 같은 훈련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선수들의 자세는 최고다. 부디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주길 바란다"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소위 명장도 똑같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발언자를 신태용 감독으로 바꿔보면 무슨 반응이 나올 것인지 대략 '모범답안'들이 머릿속을 지나갈 것이다. 핑계라 쏘아붙일 비난, 노력과 정신력만 호소하는 것에 대한 불만 등 불 보듯 뻔하다.

16일 오후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7 동아시안컵(EAFF E-1 풋볼 챔피언십) 대한민국과 일본의 축구경기에서 추가골을 넣은 염기훈이 동료 선수들과 기뻐하고 있다. 2017.12.16/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대표팀 맏형 염기훈은 "이번 대회가 월드컵 최종예선보다 더 떨렸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질타가 쏟아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다녀와서 어마어마한 욕을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월드컵에 또 나가고 싶다. 아내조차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또 가고 싶냐?'고 묻어보지만, 선수들의 마음은 다르다"며 웃었다.

잘하지 못하면 지적을 하는 게 맞다. 안일하고 나태해질 때 가하는 일침은 바른 나침반이 되어준다. 하지만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격려해주는 것 또한 필요하다. 최소한 지금 한국축구의 수준이 '칭찬으로 거만해질까봐 엄하게 가르쳐야할 자식' 같은 상황은 아니다.

말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주라 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땀 흘리는 동료들을, 어쩌면 더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lastuncl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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