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2군 방출선수 '인생 역전홈런'을 쏘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2017. 11. 24.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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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에서 10시즌을 뛰었지만 1군에서 겨우 11경기에만 나섰다. 주로 대주자나 대수비. 통산 타율은 2타수 1안타, 5할이다. 강병우(31)라는 이름은 프로야구 팬들에게도 낯설다. 성남고를 졸업해 LG-넥센-NC를 거쳤다. 팬들의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한 번 있었다. 2009년 겨울, LG가 선수 2명과 현금 25억원을 주고 넥센으로부터 이택근을 트레이드 했을 때다. 강병우는 그때 LG를 떠난 선수 2명 중 한 명이었다.

강병우가 지난 9월 NC 소프트 본사에서 NC 2군 고양 다이노스 선수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모습 | 고양 다이노스 제공

성남고 시절 박병호와 친구였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줄곧 투수였다. 구속은 또래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았다. “박찬호처럼 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야구의 신은 ‘쉬운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교 2년 때 갑자기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 찾아왔다. 강병우는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포수에게 던지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외야수로 전향했고, 친구와 함께 LG에 입단했다. 어쩌면 야수 전향 1년 만의 6라운드 지명은 재능을 증명하는 ‘훈장’이었다.

야구는 재능만으로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굴곡의 연속이었다. 프로 입단 뒤 빠른 발을 살리는 게 좋겠다는 조언에 따라 좌타자로 전향했다. 수비는 자신 있었다. 바뀐 폼에 적응하는 과정만 넘어서면 LG 주전 외야수를 노릴 만했다.

‘1군에만 올라간다면 해볼 만하다’ 싶었을 때 트레이드가 됐다. 넥센으로 이적한 뒤 스스로에 대한 기대보다 실망이 더 컸다. 곧 방출이 됐고, 새로 생긴 팀 NC에 테스트를 통해 입단했다. 2군도 아닌 3군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포기’라는 단어가 아른거리던 2013시즌 막판 1군에 콜업됐다. NC 김경문 감독은 “한 번 해 보자. 주전은 아니더라도 백업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강병우는 “그 말이 힘이 됐다. 석 달 동안 죽어라 방망이를 휘둘렀다. 야구 선수가 되고 가장 열심히 했던 3개월이었다”고 했다.

강병우 선수 시절 프로필 사진. NC 다이노스 제공

타격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만년 2군 선수였는데,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야구의 신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캠프 열흘 만에 슬라이딩 캐치를 하다가 어깨를 다쳤다. 강병우는 “애리조나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12시간 동안 많이 울었다. 어깨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고 했다. “나한테 그랬다. ‘고작 3개월 열심히 한다고 야구의 신이 잘 봐줄거라 믿었냐’고.”

그렇게 야구가 끝났다. 2014년 여름, 강병우는 결국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방출이 더 적합한 단어였다.

친구와 김포에 야구센터를 차렸다. 야구 동호인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는 일이었다. 제일 잘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잘 하는 일은 아니었다. 빚이 쌓이고 있을 때 선배가 찾아왔다. “보험 한 번 해 보지 않을래.”

유니폼 대신 양복을 입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를 찾아갔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 강병우는 “첫 타석에서 스윙도 못 해보고 삼진을 당한 셈이었다. 그날 밤에 술 많이 마셨다”고 했다.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6개월 동안 술을 끊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2시~1시에 퇴근했다. 하루 4시간만 잤다. “남들이 10명 만나서 3명 계약하면 나는 20명 만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일에 몰입했다. 7개월 만에 연봉 1억원 이상 보험설계사가 가입할 수 있다는 MDRT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유명 외국계 보험회사의 부지점장이다.

외국계 유명 보험회사 부지점장이 된 강병우 | 이용균 기자

지난 9월 NC는 2군 팀인 고양 다이노스 선수들을 대상으로 ‘대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캠퍼스 체험도 하고, 팀내 축제 행사도 했다. 프로그램 중 NC 소프트 본사 방문 행사 때 강병우는 NC 2군 선수들 앞에서 강사로 섰다. 직접 만든 강의 자료 제목은 ‘꿈을 그리는 사람은 꿈을 닮아간다’였다.

강병우는 “그때 함께 뛰던 선수들도 만났다. 다시 함께라면 야구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더라”라며 웃었다. 그때 강의에서 강병우는 후배들에게 변화와 기회, 목표를 강조했다. “그냥 1군에 가고 싶다는 건 목표가 아니다. 2군에서 타율 3할도 안되면 1군에 가더라도 어렵다. 그러면 내년에 3할 이상 치기 위해 뭘해야 하는지 과정을 살피고 계획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병우의 야구 인생이 그랬다. 변화가 찾아왔을 때, 기회로 연결하지 못했고, 기회가 왔을 때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강병우는 “목표가 막연했다. ‘안타치면 좋겠다. 1군에 가면 좋겠다. 연봉 많이 받으면 좋겠다’, 그건 바람이지 목표가 아니더라”라고 했다. 보험은 야구처럼 매일매일 타율이 기록된다. 강병우는 “목표를 위한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배웠다. 2군 때 생각하면 훈련 스케줄을 받기만 했지 그걸 내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몰랐다. 스케줄 안에서 내 시간을 어떻게 집중해서 쓰느냐가 중요하더라. 그걸 지금 알겠다”고 했다.

11월은 야구에서 가장 슬픈 달이다. 야구가 끝나서가 아니라 해마다 이맘 때면 수십명이 강병우의 길을 가야 한다. 막막한 미래 속에서 한숨을 쉬게 되는 계절이다. 이 세상의 또다른 강병우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후배들아, 겁내지 마라. 도전은 부끄럽지 않다. 목표가 정해지면 그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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