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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국가대표팀 감독의 현실 인식

조회수 2017. 11. 22. 09:3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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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가닥 바람은 있었다. 영패만은 당하지 않기를. 마지막 9회 공격이 남았다. 타순은 괜찮았다. 2번 이정후부터 시작이었다. 좌익수 플라이에 그쳤다. 3번 구자욱 차례가 됐다. 대회 내내 이어진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1루 땅볼로 물러났다. 일본쪽 덕아웃에서는 어쩔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선수들은 벌써 그라운드로 달려나가려고 움찔거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4번 타자가 마지막 차례였다. 김하성도 뭔가 느끼는 것 같다. 눈빛에서 예사롭지 않은 결기가 보였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마음같던가. 마무리 야마사키 야스아키의 바깥쪽 빠른 공에 끌려나갔다. 타이밍이 늦었다. 중견수가 손쉽게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27번째 아웃 카운트에 불이 들어왔다.

순간 김하성은 폭발했다. 배트를 땅에 내동댕이 치며 분을 참지 못했다. 왜 아니겠나. 도쿄돔에서, 이렇게 참담한 패배라니. 한동안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다음 날 곧바로 귀국했다. 김포 공항의 표정은 밝을 리 없다. 김하성은 “일본의 10승 투수, 그리고 마무리 투수들의 공을 봤다. 확실히 좋더라. 일본과의 수준 차이도 느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수준은 아니었다.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붙으면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주축 멤버 박민우는 다른 소감이었다. “국제대회는 이기러 가는 곳이다. 무조건 이겨야 했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일단 이겨야 한다. 졌기 때문에 아쉬울 뿐이다.”

가장 어린 이정후는 ‘방학 숙제’를 받았다고 했다. “공 스피드는 (한국 투수들과) 비슷했다. 그런데 공 끝이 좋아서 타격이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파워를 늘려야겠다는 걸 절감했다.”

APBC 대회에 숨겨진 몇가지 함정들

야구팬의 11월은 애매하다. 잔치는 끝났는 데 뭔가 헛헛하다. 삼겹살만 굽고, 밥 볶는 걸 빠트린 느낌이다. LA 갈비만 먹어도 배는 부르다. 그래도 뜨끈한 눌은밥 한 그릇은 아쉬운 법이다. 한동안 가을 야구의 뒤풀이를 맡았던 아시아 시리즈가 폐지됐다. 대신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APBC)이라는 복잡한 이름의 이벤트가 생겼다.

어차피 하는 나라는 뻔하다. 우리와 일본, 대만 셋 뿐이다. 새로 생긴 대회는 특징이 있다. 올림픽 남자축구(23세 이하)를 흉내냈다. 출전 선수의 조건을 제한했다. 24세 이하, 또는 프로 3년차 이하만 뽑기로 했다. 흥미와 변수를 제공하려고 와일드 카드 3명을 포함시켰다.

여기서 첫번째 함정이 등장한다. 허접한 느낌이다. 왠지 대단치 않아 보인다. ① 처음 생겼다. ② 단촐하게 세 나라 뿐이다. ③ 경기수도 작다. ④ 진짜 국가대표도 아니다. ⑤ 뭐 엄청난 게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맞다. 전형적인 이벤트 경기다. 그냥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모여서 뒤풀이 한마당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자리다. 대단한 본선 출전권이 걸린 것도 아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모여드는 게임도 아니다.

두번째 함정은 미명(美名)이다. 그럴듯한 뭔가가 있다. 미래라는 명목이다. ‘젊은 선수들’ 그리고 ‘올림픽’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다. 3년 뒤. 야구는 다시 오륜기 아래서 메달 경쟁을 하게 됐다. 그걸 위해서 투자는 불가피하다. 그건 곧 현재의 희생을 감당할 수 있는 명분이다. ‘지금 좀 못하면 어때? 3년 후를 위해서 그 정도 쯤이야….’

세번째 함정은 ‘전임(專任) 감독’이다. 야구계의 오랜 주장이 관철됐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대표팀을 이끌어갈 리더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인정됐다. 첫번째 적임자로 선동열 감독이 선택됐다. 큰 거부감이 없었다. 맡을만한 사람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태극호 선장으로 취임했다.

‘전임 감독제’라는 시스템에 대한 평가

첫 무대가 이번 대회였다. 그래서 주목해야 한다. 선동열이라는 개인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야구가 의욕적으로 시도하는 전임 감독제라는 시스템이 처음 가동된 무대였다. 그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

일단의 소신이 펼쳐졌다. 와일드 카드를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일본마저 막판에 방침을 선회했다. 3명의 핵심 선수를 추가했다(투수 마타요시 가쓰키, 포수 카이 다쿠야, 내야수 야마카와 호타카). 하지만 선 감독은 처음 뜻을 지켰다. “한 명이라도 더 도쿄돔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보기는 좋았다. 전임제가 아니면 어려운 결정이었을 지 모른다.

비단 와일드 카드에 대한 의식뿐만이 아니다. 실전의 선수 기용, 작전 구사까지 포괄해서 따져봐야 한다. 그 종합적인 선택의 결과에 대한 결산은 이뤄져야 한다. 과연 옳은 결정이었는가. 무엇을 얻었는가. 어떤 것을 잃었는가. 따위를 새겨봐야 한다.

접근 방식은 옳았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대표팀을 꾸려가는 게 맞다. 어차피 목표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다. 거기에 맞춰서 대표팀을 운용하겠다는 계획은 당연하다. 여기에 반대할 뜻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면 곤란한 부분이 있다. ‘현실 감각’이다.

결과를 놓고 보자. 한일전에서 2패를 당했다. 특히 결승전은 참혹했다. 힘 한번 못 써봤다. 일방적인 패배였다. 너무나 큰 격차를 실감해야 했다. 경험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혹독했다.

실적이 없는 과정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

물론 맞다. 대단치 않은 대회였다. 전패를 해도 상관없다. 25명의 선수가 모두 도쿄돔을 밟아봤다. 세대교체라는 명분도 있었다. (와일드카드를 쓰지 않겠다는) 소신도 끝까지 지키지 않았나. 7-0도 괜찮다. 100-0인들 어떻겠나. 나중에 더 큰 무대에서 갚으면 그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감성적으로만 넘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이라는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임 감독은 한계가 분명한 자리다. 스스로도 밝혔다. 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나온 얘기다. “훈련 등에 전권을 가진 게 아니다. 대회 임박해서 모든 게 이뤄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할 부분이 있다.”

전임 감독제는 만병통치가 아니다. 많은 갈등 요인을 안고 있는 시스템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선수 선발과 기용, (합숙) 훈련 스케줄 조정까지. 모든 것이 기존 구단들의 이해관계와 충돌된다. 설득과 조정이 있겠지만, 험난한 과정들이 계속 될 것은 분명하다. KBO사무국과 관련 기구가 돕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결국은 현장 책임자(감독)가 직접 뚫고 나가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다.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게 곧 여론이다. 팬들의 지지가 없으면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지지를 이끌내는 것은 곧 실적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어쨌든 감성은 즉각적이다. 박수치고, 환호하는 힘이 앞으로 나가게 만들어준다. 축 처진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도 한두번이다. 참고 기다려주는 대중의 인내력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계약 기간이 언제까지라는 것은 크게 의미없다. 굳이 월드컵 축구 대표팀의 사례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소신을 펼치려면, 팬들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은 말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뭔가를 제시해야 한다. 0-7의 패배로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다. 냉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며칠 전 선 감독과 대결에서 완승한 일본의 예를 보자. 이나바 아쓰노리 감독은 이튿날 한 시상식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요미우리의 에이스 투수인 스가노 도모유키를 만났다. 감독은 그를 보고 자신 있게 한 마디를 던졌다. “스가노군, 도쿄 올림픽에 맞춰 팀을 이끌어주게.” 대답은 명료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왠지 쿵짝이 맞는 느낌이다. 벌써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나바 감독은 왜 막판에 뜻을 꺾었을까. 그리고 결국 와일드카드 3명을 선택했을까. 국대 감독은 팬들의 꿈을 실현시키는 자리다. 마찬가지로 현실 감각도 절대로 잃어서는 안되는 위치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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