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 유상철, 강력한 창이자 견고한 방패였던 그 이름

김대령 입력 2017. 11. 20. 06:55 수정 2017. 11. 2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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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김대령 인턴기자] '특급 골잡이' '통곡의 벽' '황금 날개'…. 각 포지션에서 뛰어난 선수들에게 흔히 붙는 별명이다. 하지만 유상철에게 이런 류의 별명은 없었다. 그를 형용하는 데 있어 한 가지 포지션으로 특정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1994년 울산 현대(당시 현대 호랑이)에 입단한 유상철은 184cm의 신장과 탄탄한 체격, 여기에 엄청난 투지와 체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K리그 최고의 선수로 올라섰다.

데뷔 시즌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된 그는 처음으로 득점왕을 차지한 1998시즌 스페인의 명문 클럽 FC바르셀로나로부터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그가 국제 무대에서 선보인 활약이 얼마나 센세이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상철은 1999년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하며 처음으로 해외 무대를 밟았다. 두 시즌동안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빈 그는 2001년엔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해 황선홍, 홍명보와 한국인 3인방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4강 신화를 남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두말할 것 없었다. 유상철은 조별 예선 첫 경기 폴란드전부터 터키와의 3·4위전까지 한국 대표팀이 치른 전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특히 폴란드전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두 번째 골을 기록한 후 세레모니를 펼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사진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월드컵이 끝난 후 호나우두, 미로슬라프 클로제 등과 함께 대회 올스타에 포함되며 세계 축구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해 리그에서 활약 또한 빛났다. 일본 무대를 떠난 후 유럽 진출이 무산되자 10월 친정팀 울산으로 깜짝 복귀한 유상철은 "남은 8경기에서 경기당 한 골씩 넣어 팀을 우승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성남 일화의 독주 아래 중위권에 처져있던 팀을 우승으로 이끌겠다는 이 말은 단순한 각오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유상철은 실제로 8경기에서 9골을 터뜨리며 당시 K리그 최다 연승 기록 타이인 8연승을 이끌었다. 비록 우승 트로피를 따내진 못했지만, 이 기간 그의 활약은 국내 축구계의 전설적인 일화 중 하나로 내려오고 있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유상철은 2003년 갑작스럽게 울산을 떠나 요코하마로 복귀했으며, 이듬해 한국 선수 최초로 J리그에서 팀을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모두 우승으로 이끌며 플레이오프 없이 통합 우승을 차지한 선수가 됐다.

2005년 울산으로 복귀해 2006년 3월 12일 광주 상무와 개막전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 모든 축구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2000년 3월 1일 스포츠서울 8면>

유상철-이동국 "네덜란드 함께 가자"

'유비' 유상철(29)과 '라이언 킹' 이동국(21)이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동반 진출을 긴밀히 추진하고 있다.

이미 네덜란드 1부리그 비테세의 입단 테스트를 받아놓고 있는 일본 J1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의 만능 플레이어 유상철은 최근 80년대 초 허정무 현 대표팀 감독이 활약했던 네덜란드의 명문 클럽 PSV 에인트호번으로부터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유럽 진출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동국도 유상철과 함께 에인트호번 측의 동반입단 제의를 받아 포항 구단의 허락만 떨어지면 유럽행이 활기를 띠게 된다.

유상철과 이동국이 매니저를 함께 맡고 있는 이영중 국제축구연맹 에이전트(이반스포츠 사장)는 29일 "에인트호번 측으로부터 공식 입단제의를 받아 유상철과 이동국의 동반입단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에인트호번은 지난달 미국서 벌어진 북중미골드컵에 스카우트를 파견, 유상철과 이동국의 기량을 살폈으며 유상철은 공격수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강인한 인상을 남겼던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용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동반 이적이 이뤄질 경우 유상철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동국은 스트라이커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가고시마 인근의 구마모토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요코하마의 새 사령탑 아론 알디레스(47)는 지난달 28일 일본 기자들에게 "유상철은 수비 쪽이 적격"이라며 유럽 이적 전까지는 지난해 7골을 터뜨린 스트라이커 유상철에게 수비형 미드필더든 중앙 수비수든 포지션 변화를 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상철은 오는 6월 말 계약이 끝나는 요코하마 구단에 이미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통보한 터라 본인의 선택만 남았다. 유상철은 통역, 요리사, 어학 공부 보장 등 부대조건에 이적료 100만~150만 달러, 연봉 70만~100만 달러 선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1994년 울산 현대(당시 현대 호랑이)에 입단한 유상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직후. 벨기에는 이 실점으로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2000년 3월 9일.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활약하던 유상철.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 예선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득점을 터뜨린 유상철.

2002년 11월 17일 K리그 마지막 라운드 부산전에서는 한 경기 네 골이라는 경이로운 득점력을 발휘했다.

2006년 3월 12일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누비고 은퇴식을 치른 유상철.

A매치 124경기 18골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유상철은 이후 KBS2 '날아라 슛돌이'의 감독을 맡아 한국 축구계와 전국에 '슛돌이 열풍'이라는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해 2011년에는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프로 무대에 깜짝 데뷔했다. 리그를 뒤흔든 승부조작 사건 후 최악의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고도 이듬해 K리그 승강제 도입을 앞둔 가운데 2012시즌 대전시티즌의 1부 리그 잔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났고 2014년부터는 울산대학교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유상철 감독의 인터뷰는 오는 23일 공개한다.

daeryeong@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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