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추억 11편] 연습생 신화의 원조 한용덕

조회수 2017. 10. 3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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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신임 감독의 풀스토리

미래가 불투명할 때 ‘청춘’은  오히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합니다.  한 야구선수의 ‘청춘’도 그러했습니다.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난에 찌든 유년기, 특출 날 것 없는 야구 재능,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닥쳐 온 무릎 관절염, 결국 대학교 1학년 때 야구 포기와 함께 학교도 자퇴한 선수. 군 제대 후에 그가 한 건  트럭 운전 보조와 일용직 노동일 야구와는 조금도 관계없는 일을 하다 보니 그에게 남은 건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는 좌절감으로 인해 술로 몸을 학대하기도 했습니다. 청춘이란 어찌 보면 인생의 가장 무모한 시절을 부르는 용어가 아닐까요. 좌절의 시간을 걷던 이 선수는 무작정 야구장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청춘의 이력서를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야구의 추억 :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은 연습생 신화의 원조, 한용덕 선수입니다.

그가 찾아 간 곳은 대전 야구장, 그리고 그곳에서 북일고 시절 은사인 빙그레 이글스 김영덕 감독을 마주치게 됩니다. 한용덕 선수는 김영덕 감독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졸랐고, 제자를 안타깝게 여긴 감독은 배팅볼 투수를 허락합니다. 때는 1986년이었지요.

구단이 그에게 제안한 연봉은 300만원… 다행히 감독의 배려로 600만원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배팅볼 투수였기에, 글러브를 비롯한 개인장비는 직접 마련해야 했습니다.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생활이 이어졌지요. 

한용덕 선수의 북일고 시절 수비위치는 유격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프로에서 투수가 된 것은 배팅볼을 던질 것이 아니라면 팀에 굳이 연습생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수백 개의 공을 던졌지만 뭘 알고 던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친절하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또한 배팅볼에 다양한 구질과 묵직한 구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 시간대의 한용덕 선수는 그저 누구도 걱정해주지 않는 어깨의 통증을 견디기 위한 나름의 투구요령을 터득해가며 우직하게 직구를 뿌려댔을 뿐입니다. 그래선지 그의 투구폼은 독특했습니다. 신인 시절의 박찬호처럼 왼발을 높게 차올리는 ‘하이키킹’을 하고서도 정작 공을 던지는 상체는 별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보기에 얼핏 무성의해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이었죠. 확실히 그의 폼은 역동적이기보다는 여유만만하고 능글맞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어딘가 어설픈 동작으로 구속은 빠르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공을 꽂아 넣은 것은 거친 세월에 다져진 굳은살로 인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뒤 기적이 일어납니다. 한용덕 선수가 정식선수로 등록되었던 것이지요. 미숙한 공이나마 하나하나 허투루 던지지 않았기에, 던질 줄 아는 공은 거의 없었지만 오로지 묵직한 직구 하나만으로도 ‘쓸모’를 만들어냈기에 얻어진 결과가 아닐까요?

청춘의 또 다른 의미는 ‘성장’일 것입니다.

한용덕 선수는 1990년, 일본 전지훈련에서 ‘사토’ 인스트럭터가 가르쳐준 변화구를 배우면서 투수로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 시즌 곧장 13승을 올리며 당당히 이글스의 주축투수로 진입합니다.

그 뒤로 1994년까지 그의 전성기가 열립니다. 1991년에는 17승, 1994년에는 16승…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승수를 올린 투수였지요.

1994년 시즌에는 놀라운 사연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가 시즌 중에 그는 교통사고를 겪었던 것이지요. 아내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면서 그 자신이 입은 부상도 문제였지만 거의 다리를 잃을 지경에 놓인 아내를 간호하는 일이 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6승…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더 놀라운 기록을 남겼을지 모릅니다.

교통사고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변곡점이 됩니다. 사고 이루 그는 정돈되지 못한 몸과 마음 탓에 제대로 마운드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다시는 사고 이전의 성적을 회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실이 아닌 거친 들판에서 밟히며 자란 들꽃의 생명력은 역시 좋을 때보다는 어려울 때 확인되는 것이지요. 한용덕 선수는 그로부터 10여 년간 성적을 뛰어 넘어 그야말로 이글스 마운드의 마당쇠로 활약하게 됩니다.

정상의 자리를 바라보며 힘을 내는 것은 사실 많은 이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내내 한 순간도 주저앉지 않고 분투하는 것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지요.

1995년은 한용덕 뿐만 아니라 ‘페넌트레이스의 최강’ 이글스가 슬럼프를 겪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타선에서는 장종훈의 홈런신화가 이어졌고 마운드에서는 정민철이라는 특급 선발과 구대성이라는 특급 마무리가 나타났지만 팀의 성적은 바닥권이었지요. 1995년부터 1998년 사이 이글스는 두 번의 6위와 한 번의 7위로 주저앉게 됩니다.

그 시절 한용덕 선수는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았고 이기는 경기와 지는 경기를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구위는 이전만 못했고 해마다 승수보다 많은 패전 수를 쌓아가야 했지만 그는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졌습니다.

선발로 던지다가 후배 이상목의 컨디션이 회복되면 다시 계투로 물러앉았고 그러다가 구대성에게 고장이 생기면 마무리로 출격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지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서기도 했지요. 그는 기록과 타이틀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감독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때로는 팬들을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마운드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며 최대한 많은 상대 타자들을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플레이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내 단순하고 담백했습니다.

한용덕 선수의 등번호는 40이었습니다. ‘40세까지 선수로 뛰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담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겨울... 만 서른 아홉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구단은 그를 방출해버렸고 한 해 더 뛰고 싶은 마음은 결국 그쯤에서 접어야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값지게 이어온 선수생활이었고 돌아보면 완전 연소시킨 열일곱 시즌이었음을.

한용덕 선수는 한국 야구에서 정말로 특이한 존재입니다. 그가 훌륭한 투수였음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무수히 많지만 딱히 한마디로 소개할 ‘타이틀’은 단 한 개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9살까지 17년 동안 2,080이닝을 던지며 통산 10위에 해당하는 120승을 올린 투수이고, 16번의 완봉승은 통산 7위에 해당하며, 1291개나 잡아낸 삼진도 통산 5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그가 던진 이닝수도 통산 3위에 해당됩니다.

이기는 경기뿐만 아니라 지는 경기에서도 던졌던 그는 118번의 패전으로 통산 최다패전 부문에서도 4위에 올라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개인타이틀을 얻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승은 물론, 방어율, 탈삼진, 어느 쪽이건 단 한 해도 정상의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지요. 그만큼 그는 화려한 투수가 아니었습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투수였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극히 단순하고도 꾸준했던 청춘의 이력을 더듬으며 결국 묘한 청량감을 느끼게 됩니다.

야구란, 기록과 타이틀을 위한 플레이가 아니라 혼신을 다한 플레이 끝에 남은 땀 배인 청춘의 기억이란, 신선한 감동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야구에서 청춘을 보았습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의 주인공은 ‘무관의 제왕’ 한용덕 투수였습니다.

원작 | 김은식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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