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패자의 축하

조회수 2017. 10. 31. 08: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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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일본시리즈가 생각났다. 최종 7차전이었다. 홈 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3-0으로 앞서 갔다. 9회가 됐다. 새로운 투수가 마운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크리넥스 스타디움을 꽉 채운 관중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영접하듯 일제히 두 손을 모았다.

에이스 다나카 마사히로였다. 그는 바로 전날 9이닝을 완투했다. 무려 160개의 공을 던졌다. 그러나 패전 투수였다. 그 해 처음 당한 패배였다.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합해 30연승 중단.) 하지만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또다시 그를 지목했다. 도아게(胴上げㆍ헹가래) 투수의 영예를 누릴 사람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어깨가 멀쩡할 리 없다. 힘 없는 공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었다. 안타 2개를 얻어맞았다. 2사 1, 3루에 몰렸다. 마지막 타자 야노 겐지를 삼진으로 잡고 간신히 시리즈를 끝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잔인한 혹사라는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2년전 도호쿠 대지진의 아픔을 겪었던 라쿠텐 홈 팬들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누구는 손수건을 적셨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수호신에게 갈채를 보냈다.

9회 말이 됐다. 관중석은 요지부동이다. 누구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원정 팀 벤치가 무겁게 움직였다. 1년 동안 그 많은 욕을 먹던 투수코치가 나온다. 심판에게 공을 받아들며 누군가의 이름을 읊었다. 입 모양은 안봐도 뻔하다. 불과 며칠 전 122개를 던졌던 투수임이 분명하다.

연습 투구를 마친 양현종이 모자를 벗었다. 외야를 향해 등을 졌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모자를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마음을 모았다. 이윽고 기나긴 1이닝이 시작됐다.

마지막 타자 김재호는 쿨하게 끝냈다. 과감한 초구 승부였다. 포수가 머리 위로 높이 뜬 플라이를 잡아냈다. 하지만 김민식은 초짜라 서툴다. 기쁨에 겨워 중요한 것을 놓쳤다. “정신이 없어서 공이 어디 갔는 지 모르겠다”며 허둥거렸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 한 손 가득 반지가 넘치는 최형우가 우승구를 잘 챙겨 놨다는 후문이다.

덕아웃에서 난리가 났다.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이 터졌다(박재용 2군 타격코치). 김기태 감독의 눈자위도 붉어졌다.

선수들은 마운드에서 뒤엉켰다. 환호하고, 포효했다. 기쁨이 넘치는 그 순간 누군가는 마운드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반성문 쓴 어린애 같았다. 등번호 33번이었다. 빛나는 댓글 하나가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진심 김주형은 양현종에게 108배라도 해라. 가루가 될뻔했다. 생명의 은인으로 모셔라.’

우승 감독의 소감은 밍밍하다. 틀에 박힌 얘기뿐이다. “경기 전에는 인사말을 어떻게 할까 준비 많이했는데, 아무 생각도 안난다.” 하지만 차릴 건 다 차렸다. 팬들과 선수들의 노고에 대한 치하는 물론이다. 그룹 고위층에 대한 감사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게다가 예의도 바르다. 상대에 대한 위안도 잊지 않았다. “김태형 두산 감독과 선수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말을 꼭 전하고 싶다.”

맞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달랐을 것이다. 우승의 밝기는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명실상부한 최강자였다. 이른바 삼성 왕조를 종식시킨 신흥 세력 아닌가. 넘사벽의 전력으로 2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명가다. 새로운 두산 왕조의 실현을 꿈꾸고 있었던 막강한 팀이었다. 1차전을 꼼짝 못하고 내줄만큼 끈끈한 전력이었다. 덕분에 화려한 대관식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챔피언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반면 패장은 담담했다. “고생은 선수들이 했다. 3년 동안 계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너무 고맙다. 몸도 안 좋은데 테이핑을 감아가면서 열심히 해준 덕이다. 팬들과, 스태프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잠시 후 그는 활짝 웃는 모습으로 울먹이는 승장의 손을 꽉 잡아줬다.

어제는 1년 중에 가장 슬픈 날이었다. 야구가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토미 라소다)

그래서 그런 지 수많은 아쉬움과 한숨이 잠실 구장 곳곳에 한처럼 서려 있었다. 감성의 잿빛 찌꺼기들은 엄혹한 승부의 뒤끝으로 남았다. 그것들은 끝내 환호와 기쁨에 들뜬 그라운드와 섞이지 못한 채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런 무렵에는 그런 장면이 생긴다. 극명한 빛과 그림자가 드러나는 순간 말이다. 바로 ‘패자의 축하’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었다. 먼저 쓰러트리지 못하면 내가 넘어진다. 약점을 찾으려 눈에도 핏줄을 세운다. 1인치를 앞서기 위해 거친 숨소리를 주고 받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늘 맞딱트려야 하는 숙명같은 존재다.

하지만 27번째 아웃카운트는 평온을 선물한다. 치열함은 더 이상 필요없다. 따뜻한 축하와 위로만이 남을 뿐이다.

늘 그랬다. 진 사람들은 가슴이 컸다.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고, 안아줬다.

그 중에도 특별했던 때가 기억난다. 불과 몇년 전이다. 패장은 인터뷰를 서둘러 끝내려했다. ‘뭐 좋은 기분이라고 기자들 얼굴 오래 보려고 하겠나.’ 그러려니 했다. 그가 일어나며 그런 말을 했다. “대충 됐으면 일어서겠습니다. 빨리 가서 우승팀 축하해줘야지요.”

저 사람이 제 정신인가 했다. 충격이 너무 컸구나. 그래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랬다.

그들의 왕조 5년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정규 시즌 1위를 하고도, 겨우겨우 턱걸이로 올라온 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시리즈였다. “프로의 2등은 비참한 것이다. 선수 때 너무 많이 해봐서 잘 안다.” 자기 말마따나 그렇게 서러운 2등으로 다시 돌아간 날이었다.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연루돼 선수단은 풍비박산이 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와, 그들은 도열했다. 무려 20분간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박수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저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챔피언 못지 않은 2등이었다. 새삼스레 그들이 생각나는 어제였다.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진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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