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from상암] 그래도 K리그는 뜨겁게 돌아가더라

홍재민_편집장 입력 2017.10.22. 07:33 수정 2017.10.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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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홍재민(서울월드컵경기장)]

‘온-오프라인’이라고 줄여 쓴다. 한국 축구의 온라인은 요즘 화가 펄펄 끓는다. 11월 A매치 장소 결정 소식에도 댓글이 폭발한다. 21일 오후는 오프라인도 뜨거웠다. K리그 현장에는 함성, 박수, 투지, 열정이 가득했다.

오후 3시 서울월드컵경기장이다. 대한민국에서 A매치 다음으로 많은 관중을 동원하는 슈퍼매치다. 올 시즌 네 번째다. 자주 보면 감정이 식기 마련인데 양 팀 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경기 전 미디어데이에서 나온 황선홍 감독의 “팩트” 발언이 분위기를 띄웠다. 물론 수원삼성블루윙즈는 라이벌보다 아시아 무대에 가까이 갔다는 게 ‘팩트’이다. 둘의 맞대결은 언제나 일촉즉발이다.

2층 관중석 전체가 통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과거 6만 관중을 떠올리면 슬쓸함이 밀려온다. 경기 전부터 예매율이 기대에 밑돈다는 우려가 들렸다. 다행히 팬들의 공간으로 남은 1층 관중석은 대부분 찼다. 2만7천 명은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다. 양쪽 골대 뒤는, 언제나 그렇듯이, 빨강과 파랑으로 물들었다. 몸을 풀러 나오는 선수들에게 양쪽 서포터즈가 힘을 담아 박수를 보낸다. 사이즈가 줄어도 슈퍼매치의 기대감은 여전하다.

양 감독이 경기 전 예상한 “오늘은 미들 싸움”은 경기 초반부터 실현되었다. ‘터프’한 플레이스타일을 갖춘 선수들이 제 임무를 다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힘이 중앙으로 너무 쏠린 탓인지 두 팀의 측면 수비는 허술했다. 서울의 윤승원과 윤일록이 수원의 양쪽 측면을 어렵지 않게 뚫었고, 수원의 염기훈과 김민우는 서울의 오른쪽 옆구리를 쿡쿡 쑤셔댔다. 전반 28분 신화용은 윤승원의 결정적 슛을 막으며 이날도 ‘하얗게 불태울’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웅크렸던 경기는 후반 들어서 기지개를 켰다. 후반 4분 데얀이 크로스바를 때렸다. 붉은 탄식이 쏟아졌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울 팬들은 더 큰 탄식을 흘려야 했다. 후반 5분, 수원의 이용래가 선제골을 터트렸다. 그동안 쌓인 마음고생이 눈물로 나올 뻔했지만 이용래는 겨우 참았다(경기 후 인터뷰에선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6분 뒤 데얀의 페널티킥 동점골 덕분에 서울의 실망은 사라졌다. 후반 29분 윤일록이 역전골을 터트렸다. 서울 벤치가 바삐 움직이며 승점 3점을 위한 정리에 들어갔다.

슈퍼매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후반 추가시간 김은선이 임민혁에게 밀려 넘어졌다. 소심해질 수도 있는 시간대에 이동준 주심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비디오판독(VAR)도 큰 결정에 동의했다. 경기 내내 발만 동동 구르던 조나탄이 세게 찼고, 양한빈이 뻗은 손끝을 스친 볼이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파랑이 불타오르자 빨강은 얼어붙었다. 추가시간이 추가되었다. 서울의 실낱 희망은 금세 꺼졌다. 수원이 기사회생했다. 2-2 무승부.

경기 종료 휘슬이 길게 울린 뒤에도 슈퍼매치는 계속되었다. 탈진한 선수들이 대자로 쓰러졌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인 것 같았다. 서울 선수들은 주심을 둘러쌌다. 분통이라기보다 하소연이었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열기는 금방 식지 않았다. 기자석 주변의 통로는 꽉 막혀있었다. 그라운드 쪽을 향해 화를 내는 사람들과 반대쪽을 향해 귀가하는 사람들이 엉킨 탓이었다. 분노와 허탈함이 빼곡했다. 그들의 표정을 한데 모아 ‘다 이긴 더비를 막판에 놓친 팬들의 표정’이라고 정의해도 좋을 법하다.

원정 서포터즈의 분위기는 밝았다. 무승 사슬을 끊지는 못했지만, 갈 길 바쁜 적수의 발목을 잡았다는 자체가 이날 수원 팬들에게는 포만감이다. 이들에게는 ‘질 뻔했던 더비에서 마지막 순간 살아난 팬들의 표정’이라는 제목이 어울린다. 나흘 뒤에는 부산에서 FA컵 준결승전도 남아있다. 서울만큼 푹 쉬지는 못해도 행복한 피로다. 서울의 아쉬움은 수원의 즐거움이고, 수원의 희망은 서울의 절망이다. 그런 축구의 진리를 상암에서 실컷 즐긴 쪽은 파란색 서포터즈 쪽이었다.

문득 경기장 안 모든 이가 고마워졌다. 토요일 오후 시간을 K리그 경기장에서 보내는 사람들이다. 지금처럼 한국 축구가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경기장을 직접 찾아 90분에 온갖 감정을 싣는 사람들이다. 데얀의 투지에 구호를 외치고, 이용래의 감동을 격려한다. 90분 내내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른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골에 자기 일(당연히 자기 일이다)처럼 반응한다. 선수들의 포효와 비명을 귀로 직접 듣고, 그들의 땀내를 맡으며 박수를 보낸다. 오프라인의 열기는 경기 후 온라인으로 번진다. 슈퍼매치는 경기가 재미있어서 관중이 많은 게 아니라 관중이 많아서 슈퍼매치가 재미있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사진=FApho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