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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자 PS리포트]크리스 테일러의 다저스 29년만에 월드시리즈로

민훈기 입력 2017.10.20. 13:27 수정 2017.10.2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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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에서 시즌 시작한 테일러 2개의 결승 홈런과 9득점 등 맹활약으로 NLCS 승리에 수훈

크리스 테일러는 운이 억세게 좋은 선수입니다.

2016년 중반 LA 다저스가 유망주 투수 잭 리를 시애틀에 내주고 내야수 크리스 테일러를 받았을 때 이 트레이드를 주목하는 외부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저스 야구를 좀 아는 사람들은, 비록 성장이 더디지만 드래프트 1라운드 강속구 투수 유망주를 내주고 별 볼일 없는 선수를 내줬다고 오히려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저스 이적 후 34경기에서도 테일러는 2할7리-1홈런-7타점으로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지난 스프링 캠프 22경기에서 3할5푼4리를 쳤지만, 무명 선수들이 사력을 다한 시범 경기에서 반짝하는 경우는 너무도 흔한 일이기에 역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2017시즌의 시작은 마이너리그였습니다.

올 시즌을 마이너에서 시작한 테일러는 1번 타자와 내야, 외야를 오가는 전천후 수비 등으로 다저스의 PS 상승세의 숨겨진 영웅입니다. @LAD SNS

 

잠깐 20일(이하 한국시간)의 NLCS 5차전으로 가볼까요. 

이번 포스트시즌(PS) 들어 무패 행진을 달리며 투타 완벽함을 자랑하던 다저스는 전날 4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을 스윕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단 4안타에 홈런 2개로 2점을 뽑는데 그치며 2-3으로 분패했습니다. 타선은 돌연 식은 느낌이었고, 컵스가 흐름을 가져가는 분위기도 감지됐습니다. 5차전도 역시 전통의 리글리필드에서 열광적인 컵스팬들 앞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습니다. 20일 컵스 선발은 1차전에서 5이닝 2피안타 2실점으로 준수한 모습을 보인 좌완 퀸타나. 여전히 궁지에 몰린 컵스로서는 기대를 걸만한 카드였습니다.  

1회초 퀸타나는 초구 150km의 강속구를 던졌고, 다저스 1번 타자 테일러는 헛스윙. 2구는 볼이었지만 3구째 149km 강속구가 다시 스트라이크존을 파고들었고, 볼카운트는 1-2.

1회 상대 1번 타자의 기를 꺾는다는 것은 기선제압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는 버텼습니다. 4구째 떨어지는 커브 유인구를 참은 테일러는 5구째 152km 강속구도 파울볼로 커트했습니다. 6구째 커브를 다시 골라내 풀카운트가 되자 퀸타나는 연속으로 패스트볼을 던졌으나 모두 커트. 9구째 움직임이 좋은 투심 패스트볼이 몸쪽 낮게 날아들었지만 테일러는 참아냈습니다.

1회초 선두 타자 9구 볼넷.

퀸타나는 이날 2번에 배치된 다저스의 간판타자 저스턴 터너를 삼진으로 잡고 기세를 올리는 듯 했지만, 3번 슈퍼루키 벨린저에게 우측에 적시타를 얻어맞습니다. 다저스는 그렇게 적지에서 선취점을 올렸고, 안그래도 전날 불안한 1승을 거뒀던 리글리필드의 불안감은 급격히 가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야구는 분위기의 경기! 전날 빼앗길 뻔 했던 분위기를 다저스는 1번 타자 테일러의 9구 볼넷과 22세 루키 벨린저의 적시타로 가져왔습니다.


테일러가 억세게 운이 좋은 실례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시애틀에서 테일러는 자리가 없었습니다.

2015년이 기회였지만 스프링 캠프 부상이 있었고 케텔 마르테가 등장하면서 잘해야 백업 혹은 마이너리그 저니맨으로 방향이 잡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저스로 이적했고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올해도 마이너에서 시작했지만 주전 2루수 포사이드가 부상으로 빠지게 되자 다저스는 테일러에게 잠시 유틸리티 내야수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잠시만’이라는 전제가 붙은 콜업. 그런데 테일러는 모두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전반기 72경기에서 .285-10홈런-38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올해 전까지 빅리그 120경기에서 1홈런을 기록했던 타자였습니다.  

기대를 훨씬 능가하는 타격 능력을 발휘한 그를 마이너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다저스는 다소 무리해 보이는 시도를 합니다.

크리스 톨의 시즌 아웃과 작 피더슨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긴 외야에, 그것도 중견수에 테일러를 투입해 보기로 했습니다. 대학 시절 레슬링 선수를 지냈고, 마이너시절 한 시즌 38도루를 기록했을 정도로 운동능력과 스피드를 지닌 테일러였지만 그는 줄곧 내야수였습니다. 주변의 시각은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는 전천후 내야수에서 이제는 전천후 내, 외야수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갔습니다. 올 시즌 그는 2루수로 22경기, 유격수로 14경기, 3루수로 8경기를 뛰었고, 오히려 중견수로 49경기, 좌익수로 48경기를 뛰면서 외야의 공백을 훌륭히 메웠습니다. 20일 5차전에서도 중견수로 빼어난 수비를 뽐냈습니다. 100경기도 안 되지만 아웃필드 어시스트 7개는 리그 12위였습니다.  

다시 5차전 3회초

2-0으로 앞서 가운데 선두 타자로 나선 테일러는 다시 7구의 긴 승부를 펼친 끝에 좌측에 2루타를 치며 또 기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터너가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우전 안타로 테일러를 불러들였습니다. 이날만 2득점째. 테일러는 4회초 또 선두 타자로 나왔고, 또 안타를 치며 진루했습니다.

 물론 이날 5차전의 주역은 또 다른 ‘언성 히어로(unsung hero, 무명의 영웅)’ 키케 에르난데스였습니다.

키케는 2회초 홈런을 치며 2-0으로 리드를 벌렸고, 3-0까지 앞선 3회초에는 벌써 바뀐 컵스 두 번째 투수 론돈의 초구 141km 슬라이더를 받아쳐 우측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그랜드슬램, 만루포를 터뜨렸습니다. 아직 3회였지만 대세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결정타였습니다. 그리고 키케는 9회초 또 홈런을 쳤습니다. 한 경기 3홈런 7타점의 ‘인생 경기’로 다저스 사상 PS 최초의 3홈런 경기였습니다.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스타들의 그늘에 가려있던 키케는 5차전에서 3홈런 7타점이라는 인생 최고의 경기를 펼쳤습니다. @LAD SNS

 

작년에 컵스에 막혀 월드시리즈 진출이 또 무산됐던 다저스는 이번 시리즈는 ‘영웅 탄생 시리즈’라고 할 정도입니다.  

1차전에서는 커쇼가 선제 2점포 허영 등 5이닝 2실점으로 다소 불안했지만 야시엘 푸이그가 자신의 PS 첫 홈런 등 맹활약으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부상으로 빠진 코리 시거를 대신해 들어온 컬버슨이 동점 희생타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도 역전타는 테일러의 홈런으로, 2-2의 균형을 6회말에 허물었습니다. 다저스의 5-2 승리.

 

2차전에서는 역시 ‘터너 타임’의 진수를 보여준 저스틴 터너의 끝내기 3점포가 있었습니다.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 커크 깁슨의 연장 끝내기 대타 홈런 이후 29년 만에 다저스의 첫 PS 끝내기 홈런이었습니다. (다저스의 6번째 PS 끝내기였는데 홈런으로 끝난 것 두 번입니다.) 터너가 예상치 못한 깁슨의 축하 메시지를 받고 감격했다는 소식도 유명해졌습니다.

이날 푸이그는 볼넷 3개나 고르며 달라진 모습을 각인했습니다. 9회에도 푸이그는 선두 타자로 나와 볼넷을 골랐습니다. 그러나 투아웃으로 이어지며 경기는 연장으로 돌입할 분위기. 이 대목에도 테일러가 있습니다. 2아웃에 타석에 나선 테일러가 볼넷을 골라내며 터너에게 기회를 연결했습니다. 다저스의 4-1 승리.  

3차전은 선발 다르빗슈가 6과⅓이닝 1실점 7K의 호투를 바탕으로 3경기 연속 역전승으로 거둡니다. 1회말 슈와버가 다르빗슈에게 홈런을 치며 3경기 연속 홈런으로 선취점을 가져간 컵스였지만 2회초 오랜만에 이디어가 동점포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또 테일러였습니다. 3회초 테일러는 135.3미터의 장거리포로 2-1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1차전에 이어 또 결승 홈런이었습니다.

다저스 타자가 단일 PS에서 결승 홈런 2개를 친 것은 1977년 더스티 베이커 이후 처음입니다. 또한 이날 테일러는 적시 3루타도 기록했는데, 다저스 사상 6번째로 PS 한 경기 홈런과 트리플을 친 타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테일러는 3차전 홈런으로 MLB 사상 최초로 같은 PS에서 내야수와 외야수로 각각 나서 홈런을 친 타자가 됐습니다. 1차전에서는 중견수로, 2차전에서는 유격수로 나서 홈런을 쳤습니다.  

정규 시즌 테일러는 140경기에 출전해 2할8푼8리에 85득점, 2루타34개, 3루타 5개, 21홈런, 72타점, 17도루를 기록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생애 최고기록입니다. NL에서 타격 21위, 장타율 20위, OPS 22위, 2루타 공동 12위, 도루 공동 15위에 도루 성공률 4위였습니다. 또한, 멀티히트 경기 40번으로 팀 4위, 3안타 경기 13번으로 팀 1위, 그리고 4안타 이상 경기도 3번 기록했습니다. 만루 홈런 3개는 보너스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한 무명 선수의 기록입니다.

팬그래프에 따르면 테일러는 WAR 4.7을 기록해 코리 시거(5,7)와 저스틴 터너(5.5)에 이어 팀 3위입니다. 1WAR은 약 800만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는데 테일러의 올해 연봉은 53만5000달러였습니다. 포스트 시즌 배당금이 연봉을 상회할 것이 확실시 됩니다.  

그리고 가을 잔치에서도 테일러의 활약은 계속됩니다.

8경기에 모두 출전해 2할8푼1리에 2홈런, 2루타 2개, 3루타 1개, 4타점, 9득점을 기록했습니다. 볼넷도 7개를 골라 출루율이 4할1푼이었고, 5할9푼4리의 장타율과 함께 OPS 1.004를 기록했습니다.  

다저스 이적 후 모든 것이 정말 술술 풀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야구 인생이 역전된 크리스 테일러. 물론, 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마이너에 계속 머물 수도 있었지만 마치 그를 위해 계속 빈자리가 마련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찾아오는 행운은 결국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는 것 역시 테일러는 제대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테일러는 다저스 타격지도자인 로버트 밴스코약과 타격 자세 수정에 몰두했습니다. 레그킥도 도입하고 타격 시 손의 위치를 약간 내리면서 투수가 던진 공에 조금 더 빠르게 그리고 조금 더 강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저스에서 야구 생애의 새로운 장을 연 터너의 타격에 흡사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터너처럼 장타를 펑펑 쳐내기 시작했습니다. 빅리그 첫 120경기에서 1홈런이었는데, 올해 140경기에서 21홈런이라니.  

1990년 8월 20일 생인 테일러는 만 27세입니다.

FA가 되려면 아직 4년이 남았고, 2년 후에야 연봉조정신청이 주어지는 이제 풀타임 1년차 선수입니다. 내년에도 테일러가 올 시즌의 활약을 반복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다저스 팬들에겐 자신의 역량을 확실히 각인시킨 2017시즌이었습니다.  

참, 1988년 이후 처음인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무대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에 다저스는 마지막 월드시리즈 진출과 우승을 차지했었습니다.


*컬럼을 쓰는 동안에 NLCS MVP가 발표됐습니다. 테일러가 터너와 공동 수상을 했습니다. 현지에서도 테일러의 수훈과 존재감이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기사는 minkiza.com, ESPN.com, MLB.com,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baseball 등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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