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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8편]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야구의 추억 입력 2017.09.1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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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플레이와 센스의 야구를 펼치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선수

1983년, 인천의 도원 야구장 홈팀인 삼미 슈퍼스타즈와 원정팀인 MBC 청룡이 맞붙습니다.  오랜만에 만원을 이룬 관중들 앞에서 힘을 낸  슈퍼스타즈의 중심 타자 김진우, 양승관, 이영구 선수들은 거푸 직선 타구를 날려댑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조리 아웃.  청룡의 유격수 김재박 선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재박 선수는 2루 베이스를 타고 넘는 타구부터 3루수마저 포기한 좌측 구석,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대타 금광옥이 때려냈던 까마득한 높이의 직선타구마저 껑충 뛰어오르며 잡아내버립니다.

그러자 경기 시작 전부터 악을 써가며 “김재박 바보”, “김재박 에러”를 외쳐대던 홈팀 팬들이 질릴 정도가 될 쯤,  한 홈팀 팬이 통로 쪽 순경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경찰 아저씨, 제발 저기 재박이 좀 잡아가요!”

혹 누가 빈 병이라도 집어 던질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순경이 폭소를 터뜨렸고,  1루 쪽 스탠드 전체가 쓴웃음으로 술렁였습니다.  완전무결,  철벽,  혹은 예술,  그리고 신기.

그 시절 상대팀 응원석에서조차 김재박 선수의 플레이를 묘사하는 단어들은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야구의 추억 :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의 주인공은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 선수입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에 극적으로 역전승했던 그 대회의 최종전을 기억하는 팬들은  아마도 제일 먼저 김재박 선수의 ‘개구리 번트’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6회까지 일본 선발 스즈키에게 노히트노런으로 눌린 채 0-2로 끌려가다가 김정수 선수의 2루타로 한 점을 만회하고 다시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켜 1사 3루의 찬스가 이어진 8회말. 타석에 선 김재박 선수의 스퀴즈 번트를 예상한 일본 투수는 공을 멀리 뺍니다.

하지만 김재박 선수는 공을 향해 뛰어오르며 번트를 대는 기상천외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그의 배트를 맞고 3루 쪽 파울선을 따라 나란히 굴러간 공은 내야안타가 되어 동점을 만들어 냈고,  그렇게 살아나간 김재박 선수는 결국 한대화 선수의 홈런이 터졌을 때 홈을 밟으며 결승득점을 만들어냅니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과연 김재박의 천재성이었느냐, 아니면 사인미스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느냐를 놓고 말이죠.

하지만 논쟁 이전에  우리 야구사에서 손에 꼽힐 수 있는 명장면임은 분명한 듯 싶습니다. 사실 김재박 선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명장면 제조기로 불리었습니다. 1루로 송구하는 동작으로 상대편 3루 주자를 기만해 홈에서 잡아내는 유격수였고, 상대 외야수가 잠시 방심하는 틈을 타 평범한 안타로 2루를 점령하는 주자였으니까요. 

김재박 선수의 등장은 동네 야구의 모습마저 바꿔나갑니다. 아이들끼리 서로 유격수를 하겠다며 육박전마저 벌이기도 했고,  유격수를 맡은 선수는 다이빙캐치를 한답시고 무수히 옷을 찢어먹었습니다.

또한 유격수 녀석은 주자도 오지 않는 비어있는 2루에  ‘백핸드토스’를 하며 어이없는 에러를 남발하기도 했죠.  모두 김재박 선수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게 투수와 포수를 제외하면 다 똑같은 ‘야수’라는 생각은 김재박 선수에 의해 깨졌고,  우리는 ‘유격수’라는 또 하나의 포지션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등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김재박 선수의 이름을 아는 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작은 키, 그리고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느렸던 다리 때문입니다. 그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도, 명문대학교에서도 원치 않는 선수였고, 그래서 오로지 야구를 계속 하기 위해 대구와 서울, 다시 대구를 오고가야 했던  고단한 범재(凡才)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대학과 군 시절을 거치며 뒤늦게 야구에 눈을 뜬 김재박 선수는 1975년,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한 아시아선수권에서 투수로서 9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는 한편 타자로서도 4안타를 치며 우승을 이끌어 다재다능함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출전한 사상 첫 세계대회인 대륙간 컵에서도 투타의 주축으로 활약합니다. 심지어  그의 빠른 발과 센스는 팀의 주요 득점루트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1977년,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김재박 선수는 대형 사고를 칩니다.  그 해를 결산하는 종합시상에서 타격·홈런·타점·도루 등  공격 주요 부문을 석권한 데 이어 신인왕, MVP 그리고 특별상으로 주어진 ‘트리플 크라운상’까지 무려 7개의 트로피를 독식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해 올스타전에서 홈런 두 방을 날린 ‘미스터 올스타’ 역시 그였습니다.

국제무대에서도 그의 진격은 계속 됩니다. 1977년 니키라과 슈퍼월드컵에서는 무려 .426의 타율(54타수 23안타)로 대회 타격왕과 최다 안타왕, 그리고 도루왕까지 석권하며 한국야구사에 첫 세계대회 우승의 영광을 안겼고, 1981년 대륙간컵에서도 대회 ‘베스트9’의 유격수 부문에 선발되며 4위로 처진 한국 팀의 체면을 살리기도 했을 정도였죠.

1983년, 김재박 선수가 한 해 늦게 프로야구 무대에 서기까지도 숨은 사연이 존재합니다.

프로야구를 앞두고 서울 출신 선수들을 선발하는 드래프트에서 우선권을 쥐고 있던 MBC 청룡은 세계 대회로 인해 1982년 개막 시즌에 당장 쓸 수 없는 줄 알면서도,  그리고 해외파 박철순을 포기하면서도 무조건 김재박 선수를 선택합니다. 

그렇게 뒤늦게 프로에서 만나게 된 김재박 선수는 명불허전이었습니다. 그를 응원하는 팬들도, 응원하지 않던 팬들마저도 모두 그의 플레이를 챙겨보게 됩니다. 그의 몸놀림은 승부 이상의 ‘보는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죠.  돌이켜보면, 김재박 선수의 프로 시절은 전성기는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프로야구 스타들이 대개 그랬듯 그 역시 프로야구가 개막했을 때 서른 가까운 나이를 먹었고,  장기적인 야구 인생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과학적인 몸 관리의 혜택도 받지 못했기에 전성기를 길게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1984년과 1985년, 딱 두 번 3할을 넘겼을 뿐인,  통산 .273의 평범한 타율.  1985년 딱 한 번 차지한 도루왕 타이틀.  이 모든 기록들은 ‘김재박’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그는 무려 다섯 개의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김재박 선수는 분명, 한국 야구에서 ‘유격수’라는 포지션을 개척한 선수입니다. 그가 열어준 논과 길이 없었다면 1980년대 초반 난데없이 경북고의 유중일이라는 유격수가 고교야구 최고의 스타로 떠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이종범, 유지현, 김민호라는 유격수들이 나타나 주목을 받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김재박 선수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유격수를 넘어 야구를 개척한 선수라는 점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두뇌플레이와 센스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야구의 추억 :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은 ‘훌륭한 유격수’를 넘어 ‘대한민국 명 유격수의 원형’이 된 영웅  김재박 선수가 주인공이었습니다 .

다음주 수요일에는 '꼴찌 팀의 서글픈 스타' 장명부 선수가 주인공입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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