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카드] 곽빈의 144구, 어른들의 과욕에 희생되는 '미래'

문대찬 2017. 9. 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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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악물고 던지는 배명고 곽빈.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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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소년야구대표팀이 세계 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값진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성열 유신고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은 11일(한국시간) 캐나다 온타리오주 선더베이 포트아서 경기장에서 열린 미국과의 결승에서 0대8로 패하며 2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대회에 나선 어린 선수들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09년 WBC 준우승을 보고 야구를 시작한 이른바 ‘베이징키즈’들이다. 고교 때부터 남다른 기량을 보여 ‘황금세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이 참여한 2018 KBO 신인지명 드래프트는 어느 때보다 경쟁이 뜨거웠다.

과연 이름값이 아깝지 않았다. 향후 KBO를 이끌 유망주들은 이번 대회 예선 5전 전승을 포함해 슈퍼라운드에서 강호 쿠바와 일본을 차례로 누르며 가치를 증명했다. 비록 미국에 2번 패하며 우승이 좌절되긴 했지만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했단 점에서 이번 대회는 준우승 그 이상의 소득이었다. 국내 야구팬들도 뜨거운 박수와 함께 기대를 내비쳤다.

명(明)이 있는 만큼 암(暗)도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대회에서 시대를 역행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배명고 투수 곽빈(두산)의 144구 혹사 논란이다.

곽빈은 지난 9일 슈퍼라운드 미국과의 경기에 선발투수로 나섰다. 곽빈과 뜨거운 투수전을 펼쳤던 미국의 에이스 에단 핸킨스는 6이닝 1실점 이후 마운드를 내려갔지만 곽빈은 7회, 그리고 8회와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당혹감을 자아냈다. 9회 1사 후 2루타를 허용한 뒤에야 하준영(성남고)에 바통을 넘기며 길고 긴 등판을 마쳤다. 투구 수는 무려 144개였다.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최근 프로야구는 선발과 중간계투의 분업화가 체계적으로 이뤄져 완투형 투수를 보기 힘들다. 자연스레 선발이 110구 이상을 던지는 경우도 드물다. 그런데 막 프로 지명을 받은 투수가 144구를 던졌다.

이성열 감독의 과욕이었다. 성적을 거두는 데 급급해 앞날이 창창한 선수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곽빈은 이미 토미존 부상 경력이 있는 선수다. 때문에 배명고에서도 그를 배려해 투구 수를 철저히 관리했다. 혹 선수가 자청했더라도 감독이 나서 뜯어 말렸어야 했다. 이성열 감독은 배명고의 그간 노력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고교야구의 투수 혹사는 이전부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모든 고교 스포츠가 그렇지만 특히 고교 야구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중요하다. 선수들의 성적은 곧 프로데뷔와 연관돼 있고 감독들은 성과에 따라 자리를 보존 받는다.

선수층이 얇은 국내 특성상 성적을 내기 위해선 특정 선수가 경기에 자주 나서야 된다. 성장기에 있는 선수들이라 근육과 뼈가 파열되기 쉽고, 이들은 어깨와 팔꿈치가 상한 채로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이미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라 입단하자마자 수술이나 재활에 돌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량을 되찾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도 있다. 류현진 이후 리그를 주름잡는 고졸 출신 투수들이 전무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본의 오타니와 같은 선수가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욕심 많고 성급한 어른들이 열매가 채 열리기도 전에 싹을 자르고 있다. 이들은 “투수의 어깨는 던질수록 단련된다” “투수는 많이 던지면서 완성되는 것”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자신의 과욕을 합리화한다.

입시 제도를 근본적으로 고친다, 고교 감독들의 의식 개선이 필요하다 등의 주장은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이젠 혹사를 막을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늦었지만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장치를 내놓았다. 지난 7월 이사회를 열고 초중고 투수들의 투구 수를 2018년부터 1일 당 105구로 제한했다. 여전히 적지 않은 투구 수지만 연투 금지, 의무 휴식일 권고 설정 등으로 어린 선수들을 보호할 제도를 마련했다. 봉황대기에서 5일간 437구를 던진 제2의 김재균은 이제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혹사가 투혼으로 포장되는 시대는 지났다. 이는 고교 야구뿐만 아니라 프로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직전 해와 올해의 늘어난 투구 수를 비교해 위험도를 측정하는 ‘버두치리스트’가 야구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건강한 야구’에 대한 인식 변화를 방증한다. 선수는 감독을 위한 일개 체스 말이 아니다. 고 최동원이 “함 해보입시더”라는 다짐과 함께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둔 역사는 이제 역사로만 묻어둬야 한다. 싱싱한 어깨로 프로 마운드에서 힘차게 공을 뿌리는 영건들을 보고 싶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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