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류현진의 애잔한 커터, 그러나 뭉클한 공

조회수 2017. 8. 22. 08: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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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카의 명곡 <Enter Sandman>의 인트로가 장엄하게 울려퍼졌다. 그 곡이 시작되면 상대는 모두 고요하게 잠들게 된다(sandman=잠귀신).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열렬하게 환호했다. 일찍이 그가 그곳에서 그런 환대를 받았던 적은 없었다.

미니애폴리스의 타켓 필드였다. 홈 팀은 활짝 웃는 그에게 특이한 선물 하나를 전달했다. 기묘하게 생긴 흔들의자였다. 등받이와 팔걸이가 온통 부러진 배트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4년 전 얘기다. 마리아노 리베라가 전국으로 은퇴 투어를 돌 때였다. 각 팀마다 기억에 남는 기념품을 선사했다. 낚시대, 초상화, 선발 투수 때 기록지, 서핑 보드 등등. 그 중 최고는 단연 미네소타에서 받은 아이템이었다. 트윈스 팬들은 ‘산산이 조각 난 꿈의 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치 투어의 주인공을 향한 애교 섞인 푸념 같은 선물이었다.

어느 시즌엔가 그는 무려 43자루의 배트를 부러트렸다. 어떤 타자는 한 타석에 3개나 박살난 적도 있었다. 치퍼 존스는 그 공을 전자톱의 ‘톱날(buzz-saw)’이라고 불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마무리 투수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던 공이다. 커터(cutter)라는 이름이었다. 그의 풀 네임은 컷 패스트볼(cut-fastball)이다.

미네소타 트윈스가 전달한 이별 선물. 부러진 배트로 만든 흔들의자였다.          mlb.com

최강의 우타 라인을 막아냈던 커터

굉장히 부담스러운 경기(20일, 디트로이트전)였다. 원정, 낮게임에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좌투수 공을 가장 잘 치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좌완 상대 타율 2위(.285) OPS 1위(.849). 게다가 선발 라인업도 독하기 짝이 없었다. 우타자 8명에 스위치 히터 1명, 사실상 오른손 타자 일색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선전했다. 볼넷 4개를 내주며 투구수 조절에 실패, 5이닝 만에 내려온 게 유일한 흠이었다. 나머지는 다 괜찮았다. 무엇보다 위기를 견디는 내성이 인상적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몸쪽을 파고드는 예리한 공으로 허를 찔렀다. 1회 1사 1루에서 저스틴 업튼에게, 그리고 3회 2사 만루에서 미겔 카브레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를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생존하게 한 공은 커터였다. 이날 던진 89구 중에 가장 많은 것은 물론 직구(31개)였다. 그리고 커터(19개), 체인지업(19개), 커브(18개), 슬라이더(2개) 순이었다.

21.3%의 구사율을 보인 그 공은 커터다. 올해부터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왜 갑자기 이 공을 꺼내들었을까. 굳이 필요한 구질일까. 어떤 리스크가 있을까. 그런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1루쪽 투구판을 이용하는 좌투수에게 몸쪽 공이란

그는 제구가 좋은 투수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졌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늘, 모든 코스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명제는 특화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이다. ‘그는 우타자의 바깥쪽 낮은 코스에 정확한 공을 던질 줄 안다.’ (똑같은 곳이라도 좌타자가 있으면 달라질 수 있다. 탄착점의 환경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만 논점을 벗어나는 얘기다. 나중에 따로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어쨌든 바깥쪽 낮은 코스, 대개의 타자가 가장 어려워 하는 지점이다. 그곳을 A라고 부르자.

그가 전형적으로 쓰는 승부의 패턴도 여기서 나온다. A에 빠른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꽂는다. 결정적인 승부구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서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낚는다.

이 공을 위해 투수는 몇가지 전략적인 선택을 한다. 투구판의 위치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늘 1루쪽 끝을 밟고 던진다. A에 던지기 위한 최적화된 위치다. (불과 몇 인치겠지만) 최단 거리로 도달할 수 있는 자리다. 무엇보다 가장 편한 일직선 같은 각도를 만들어주는 곳이다.

이럴 경우 반대쪽, 그러니까 우타자의 몸쪽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선으로 빗각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뒤틀려도 목표점을 빗나간다. 가운데로 몰리거나, 타자 몸에 맞힐 위험성이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몸쪽을 포기할 수는 없다. A지점에 대한 강점을 살리려면 안쪽에도 던져야 한다. 그래서 필요성이 요구된 것이 커터다. 우타자 가까이 파고들면서 살짝 휘어지는 성질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기대되는 효과는 2가지다. 빗맞는 땅볼을 유도할 수 있다. 아니면 파울을 만들어서 카운트 싸움에 도움을 준다.

예전에는 몸쪽 공략을 위해 고속 슬라이더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변화폭이 커서 코스를 다스리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 보다는 조금 더 빠르지만, 휘어짐이 약한 것이 커터다. 실제로 그는 커터를 던지면서 너무 많이 휘어지는 문제 때문에 고민했다. 가급적 덜 꺾이는 그립을 선택했다.

그가 모델로 한 것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댈러스 카이클이다. 2015년 AL 사이영상을 수상한 좌완 투수다. 단순히 그의 동영상만을 보면서 익힌 것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그립이나 세세한 부분은 릭 허니컷 투수코치의 도움이 있었다.

여기서 <…구라다>가 주목한 것도 투구판의 위치다.

아시다시피 싱커볼 투수인 카이클은 3루쪽을 이용한다. (우타자의) 몸쪽에도 유리한 각도를 만들 수 있는 자리다. 즉, 커터를 던지기 훨씬 편한 위치다.

말했다시피 류현진은 몸쪽을 던지기 훨씬 어려운 각도다. 그곳에서도 변화가 있는 커터는 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효과를 보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

혹시 이쯤에서 그런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다. ‘정해진 것도 아닌데, 던질 때마다 투구판 위치를 조금씩 바꾸면 되지 않냐.’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게 쉽게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거의 모든 투수들은 일정한 곳을 이용한다. 마치 던지는 팔의 각도를 바꾸는 것처럼, 투수판 위치는 그만큼 민감한 요소다.

그의 커터에서 묻어나는 진한 생명력 

오클라호마 털사 출신의 댈러스 카이클은 집안 형편이 넉넉치 못했다. 고교 시절 주말이면 동네 잔디깎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반나절 고생해서 한 집에서 받는 액수는 겨우 20달러(약 2만 3천원) 남짓이었다. 그걸 몇 주간 모아야 조던 농구화를 살 수 있었다(고교 때 그는 야구 외에도 풋볼과 농구팀에서 뛰었다).

아칸소 대학에 진학할 무렵에는 꽤 괜찮은 투수로 성장했다. 당연히 메이저리그 입성도 화려할 것 같았다. 하지만 2009년 드래프트에서 찬밥신세가 됐다. 밀리고 밀려서 7라운드까지 넘어갔다. 이유는 구속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90마일 초반 밖에 안 나오는 빠른 볼의 위력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다.

사실 류현진이 카이클을 벤치마킹한 것도 어찌보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좌완인 데다 비슷한 스타일이다. 게다가 90마일 안팎의 스피드로 몸쪽에 도전할 수 있는 구질은 많지 않다. 어쩌면 궁여지책으로 선택된 것일 지도 모른다.

수술 이전에만 해도 웬만큼 견딜 정도는 됐다. 잘 하면 90마일 중반대까지는 올라갔으니 말이다. 빠른 볼로 몸쪽에 붙여서 깜짝 놀라게 한 다음, 바깥쪽으로 공략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2년여의 공백이 있었다. 아직은 재활 시즌이다. 예전 스피드를 되찾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초반에 걸핏하면 장타를 얻어맞고 휘청거렸던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커터’라는 임시방편이었다. 어찌보면 단기간에 그걸 습득하고, 실전에서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 더 대견하고 대단하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불리한 투구판의 위치를 극복하고 말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커터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구종이다. 마리아노 리베라, 켄리 잰슨 같은 특급 파워 피처들이 방망이를 박살내며 타자를 굴복시키는 공이다.

하지만 99번의 것은 전혀 다르다. 위협적인 느낌과는 까마득하다. 그렇게 탄복할 정도도 아니고, 오히려 소박함과 안쓰러움, 애잔함이 가득할 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공은 뚜렷한 메시지 하나를 전한다. 그것은 너무도 진한 생명력이다. 살벌하고 거친 야생에서도 결코 쉽게 꺾이는 법이 없다. 생존에 대한 갈급함이 묻어난다. 그래서 더욱 뭉클함이 느껴진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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