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류현진을 디스코 포즈로 만든 - 95.6마일짜리 홈송구

조회수 2017. 8. 1. 21: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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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텍사스는 살인적이다. 섭씨 40도는 기본이다. 가끔 사막을 건너던 사람들이 변을 당할 정도로 극한의 더위를 맛보게 된다. 그런 날에도 야구는 시작됐다. 작은 도시 미들랜드에서 열린 마이너리그 게임이었다. 물론 야간 경기였다. 5회 쯤이었나? 갑자기 조명탑에 불이 나갔다. 약한 불 빛 만이 그라운드를 비추고 있었다. 록하운즈라는 이름의 홈 팀은 난감해졌다. 게임은 중단됐고, 조명탑은 깜깜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필이면 관중도 꽤 많이 온 날이었다.

왓더버거 필드(Whataburger Field)에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어색함이 몰려들었다. 그 때였다. 코퍼스 크리스티 훅스라는 복잡한 이름의 원정 팀 덕아웃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쭈뼛쭈뼛, 부시럭부시럭. 어스름한 빛 사이로 두 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한 명은 앤디 시뮤닉이라는 고참 내야수다. 또 한 명은? 언뜻 봐도 파릇한 애송이다. 캘리포니아 리그 싱글A에서 뛰다가 불과 2주 전에 팀에 합류한 듣보잡이다.

둘은 그라운드로 나오더니 관중석을 향했다. 잠시 정적~. 이윽고 스피커를 통해 비지스의 명곡 <나이트 피버 Night Fever>가 울려퍼졌다. 고참 내야수와 애송이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케케묵은 디스코는 강렬하게 추억을 소환했다. 관중들은 환호하며 모두 일어섰다. 왓더버거 필드는 그날 밤 뜨거운 열기로 가득찼다.

앤디 시뮤닉은 그렇다 치자. 고향인 내시빌에서 아내와 함께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친구다. 춤하고는 어차피 일촌관계다. 그런데 신출내기는 누굴까. 낯선 팀에 와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깝’을 발휘한 그의 이름은 엔리케 에르난데스, 우리가 흔히 ‘키케’라고 부르는 친구다. 지금부터 5년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0살 때다. 그 이후로 훅스 팬들은 그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선물했다. 다이아몬드 댄서(Diamond Dancer)였다.

키케는 덕아웃의 응원 단장이다. 2015년 ‘랠리 바나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mlb.com


홈까지 78.9미터, 시속 95.6마일짜리 레이저빔


텍사스만큼은 아니더라도 LA의 날씨도 만만치 않다. 어제(한국시간 31일) 최고 기온은 화씨 82도, 섭씨로는 28도까지 올라갔다. 무엇보다 캘리포니아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주눅들만큼 강렬했다.

6회까지 0-0. 한 치의 기울기도 허용하지 않는 투수전이었다. 7회 초. 홈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조 패닉과 헌터 펜스가 연속 안타로 무사 1, 2루를 만들었다. 다음 버스터 포지는 큼직한 우익수 플라이. 패닉이 3루까지 점령했다. 1사 1, 3루. 이제부터 스치면 점수다.

브랜든 크로포드가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에서는 큰 한 숨이 나온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윽고 초구. 79마일짜리 체인지업이 몸쪽 높은 코스로 향했다. 타자는 망설임이 없다. 아낌없는 스윙이 번쩍였다. 약간 막힌 듯한 타구는 외야 필드로 날았다. 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곧바로 포수 뒤로 달려간다. 이미 3루 주자가 충분히 언더베이스할 정도의 플라이볼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투수의 예측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공이 중견수 글러브에 들어간 순간 3루 주자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누가봐도 홈까지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일단 포구 지점이 애매했다. 왼쪽으로 10미터 이상 달려가서 잡아야 했다. 때문에 정확한 송구 자세가 어려웠다. 때문에 빠른 주자라면 충분히 홈에서 세이프 타이밍을 만들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중견수가 쏴 올린 레이저 빔은 포수 미트에 너무도 정확하게 꽂혔다. 바운드조차 없는 기가 막힌 스트라이크였다. 3루 주자는 서너걸음 앞에서 이미 운명이 결정돼 버렸다.

홈 플레이트에서 운명이 결정될 무렵, 두 명의 KBO리그 출신 친구들은 포수 뒷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봐야했다. 대기 타석이었던 황재균은 (홈 송구를 보고) 주자의 슬라이딩 방향을 결정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안내할 수 없었다. 너무나 완벽한 딜리버리 앞에서 소용없는 일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류현진도 마찬가지였다. 만일의 사태(공이 빠지는)에 대비해 백업을 갔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멋진 태그 장면을 구경하면서 오른손을 번쩍 들고 ‘디스코 포즈’로 기쁨을 폭발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하긴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그가 마운드에서 던진 이날 최고 구속은 92마일(148㎞). 하지만 그 홈송구의 스피드는 95.6마일(154㎞)로 찍혔으니 말이다. 


독특한 이력의 유틸리티 플레이어 


그의 가방은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 많다. 글러브가 이것저것 여러개 복닥거리기 때문이다. 본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은 2루수다. 하지만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안해본 자리가 없다. 투수와 포수 빼고는 모든 위치를 커버한다. 그러니까 내/외야 전 포지션을 감당하는 셈이다.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그는 독특한 학력을 지녔다. 고등학교 과정을 구야나보라는 도시에 있는 군인 아카데미(American Military Academy)에서 마쳤다. 3학년 때까지만 해도 키가 5피트 6인치(167.6㎝) 밖에 되지 않아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4학년 때 5인치가 더 자라 180㎝가 되면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지명(6번, 전체 191번)을 받을 수 있었다.


키케가 자신의 SNS에 공개한 여자 친구와 데이트 장면.


최근 팬들 사이에서 그가 더욱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결혼 소식 때문이다. 키케는 지난 달 중순 SNS를 통해 오랫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스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마리아나 빈센트였다. “마리아나 당신과 함께 나이들고 늙어갈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는 멋진 멘션을 남겼다.

그는 아마 다저스 클럽 하우스에서 가장 바쁜 사람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저것 여러 포지션을 해야 하니 당연히 참여하는 훈련 파트도 수두룩하다. 그것 뿐아니다. 분위기를 위한 엔터테이너로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팀에 합류한 2015년에는 랠리 바나나를 유행시켰다. 주로 벤치워머였던 시절이었다. 지고 있을 때 덕아웃에서 바나나를 흔들면 신기하게도 팀이 역전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이 세리머니가 유행이 됐고, 작 피더슨이나 저스틴 터너와 함께 바나나 의상을 입고 바나나 송을 립싱크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작년 아버지의 날 무렵 머리를 삭발하고 나타난 모습.      키케 SNS에서 


물론 그가 철없고, 유쾌한 에피소드만 양산한 것은 아니다. 작년 6월 중순이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아버지의 날(셋째주 일요일) 무렵이다. 뜻밖의 사진 하나가 팬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민머리가 돼서 나타난 그의 모습이었다. 이유는 특별했다. 항암 치료를 받는 아버지(엔리케 에르난데스 시니어)와 고통을 함께 하겠다는 뜻이었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스카우트였던 그는 6살짜리 키케에게 처음 야구를 가르친 사람이기도 했다. 골수 이식 수술까지 받은 뒤, 지금은 상당히 건강을 회복했다.

아버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과가 있다. 아들의 경기 장면을 TV로 응원하는 것이다. 시니어는 아마 어제도 그 장면을 지켜봤을 것이다. 환상적인 홈송구. 그리고 아들이 5년전 마이너리그 구장에서 했던 디스코 퍼포먼스처럼,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투수의 뒷모습을 말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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