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김선빈의 극적인 동점 홈런, 그 결정적인 10초전..

조회수 2017. 7. 26. 17:11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프롤로그 - 댓글에 대한 피드백 

프롤로그 - 댓글에 대한 피드백

지난 6월 23일에 올렸던 <…구라다> 제목이 이랬다. ‘조선의 9번타자, 올스타전 리허설을 마치다.’ 이 글에는 400개 남짓의 댓글이 달렸다. (감사하게도) 어깨를 다독여주는 말씀들이 많았다. 반대로 부족함에 대한 귀한 지적도 반짝였다.

자고로 쓴 사람은 읽은 분들의 감상에 개입하면 안 되는 법이다. 다양한 시각과 해석, 접근이 허락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그럼에도 한 마디 보태고 싶은 부분이 있다. ‘조선의…’라는 표현을 불편해 하시는 데 대한 해명이다. 이대호를 ‘조선의 4번타자’라고 부를 때, 그리고 이를 빗대 김선빈을 ‘조선의 9번타자’라고 할 때. 주로 그런 질책이 들린다. ‘왜 엄연하고 신성한 국호를 놔두고, 조선이라는 말을 쓰냐’는 혼냄이다. 아마도 연상되는 이념적인 껄끄러움 탓이리라.

얘기의 유래는 2002년에 김현석 감독이 만든 영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 배경은 일제 강점기였다. 나라는 물론, 훈련하던 야구장까지 일본군인들에게 뺏겼다. 결국 YMCA 야구단은 일본군 클럽팀 성남구락부와 맞대결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극적인 활약을 벌인 선비가 이호창(송강호 분)이었다. 그가 바로  YMCA 야구단의, 더 나아가서는 조선의 4번타자였다.

‘조선의 4번타자’는 영화상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야구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팬들이 이대호에게 그 호칭을 선사했다. 그리고 올해는 9번타자 중에도 그렇게 불리는 선수가 생겼다.

영화 <YMCA 야구단> 포스터

복선 - 박희수, 서동욱을 빠른 볼로 제압하다 

세상에나. 비디오 판독으로 저럴 수도 있구나. 초반 흐름을 좌우한 것은 누가 뭐래도 김기태 감독이었다. 2회 결정적인 재심 요구를 성공시켰다. 이명기를 1루에서 세이프시키면서 다 끝난 줄 알았던 이닝을 되살려놨다. 결국 2점으로 끝날 2회 말이 6점으로 커졌다. 승부의 추는 한꺼번에 기울어졌다.

하지만 역사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18-17의 찬란한 명승부를 연출했던 두 팀 아닌가.

드라마의 시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이은 3회 초였다. 원정 팀은 무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최정의 타석이었다. 카운트 1-0에서 임기영의 2구째. 홈런 1위의 배트는 용서가 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타구는 우측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챔피언스 필드는 한동안 음소거 모드에 빠졌다.

이후 특유의 난전이 거듭됐다. 엎치락 뒤치락. 역전과 동점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뒤지던 경기를 따라붙은 원정 팀의 기세가 등등했다. 바닥을 헤매던 제이미 로맥의 각성이 시작됐다. 6회 역전 3점포에 이어, 8회에도 쐐기를 박는 솔로포를 작렬시켰다.

9회 말. 홈 팀의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8-10, 2점차 열세는 요지부동이었다. 4연패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첫 타자(나지완)가 간단히 처리됐다. 다음 타자 이범호. 5구째가 왼쪽 옆구리를 향했다. 진루권 하나가 생겼다. 조그만 불씨 하나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상대가 이를 방치할 리 없다. 조기 진화에 나섰다. 마무리 박희수가 등판하자 홈 팀 벤치는 대타 서동욱을 내세웠다.

좌타자 중에는 나름대로 좌투수에 강하다는 서동욱이다. 풀 카운트의 끈질긴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7구째. 박희수의 포심 패스트볼(139㎞)이 존 높은 쪽으로 파고들었다. 타자도 놓치지 않았다. 날카롭고 빠른 스윙이 돌았지만 따라가지 못했다. 헛스윙이 되면서 26번째 아웃 카운트가 만들어졌다.

이 순간 박희수는 큰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러나 힘겨운 모습은 아니었다. 정면 승부로 제압했다는 의기양양함이 가득했다. ‘이제 하나 남았다.’

박희수가 서동욱을 삼진으로 잡아내고 있다.            Sky Sports 중계화면

4구째, 준비 동작에서 무심코 드러난 단서

2사 1루. 짧은 안타라면 3~4개가 연달아 나와야 한다. 확률은 희박하다. 그러니 이제 기대할 것은 딱 하나다. 요행수, 얻어 걸리는 홈런뿐이다. 하지만 언감생심이다. 다음은 9번 타자다. 타격 1위라고 자랑하지만 장타력하고는 댐(dam)을 쌓았다. 올해 117개의 안타 중에 홈런은 고작 2개 뿐이다. 기억 난다. 그가 첫 홈런을 치던 날 덕아웃에서 입 가리고 웃던 동료들이 말이다.

정작 본인은 진지하다. 검투사 헬멧 사이로 온갖 비장한 눈빛을 쏘아대고 있다. 아는 지, 모르는 지. 박희수의 초구는 살짝 가운데 몰린 스트라이크였다. 165cm, 70kg의 체구가 모든 것을 쏟아부을 정도로 야무진 스윙을 발휘했다. 나쁘지 않은 타이밍. 그러나 포수 마스크를 때리는 파울이었다.

“초구는 홈런을 치겠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파울이 되고 말았죠.” 

2구째는 더 멀어졌다. 외곽에 잘 제구된 공이었다. 완전히 밀린 배트는 2번째 스트라이크를 허용했다. 홈 팀 벤치의 표정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김기태 감독이 쓴 웃음을 짓고 있다. 곁에 있던 수석 코치(조계현)도 착잡함을 드러냈다.

“카운트가 불리해지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이)명기형이 쳐줄 것이라는 생각에 일단 살아나가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3구째는 유인구였다. 바깥쪽 멀찍이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간’을 봤다. 그래도 수위 타자인데 그 정도 공에 따라나갈 리 없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이 됐다. 박희수는 4구째를 위해 준비 동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서 어쩌면 결정적일 지 모를 단서를 노출하고 만다. 

결정구 직전, 박희수의 시선 처리 

앞선 3구째는 땅에 한 번 튀긴 뒤 포수가 잡았다. 그럼 새로운 공으로 바꿔야 한다. 지면에 스치면서 생긴 흠집 탓에 투구 때 변화가 생길 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심(박종철)은 주머니 속에서 새 공 하나를 박희수에게 던져줬다. 이 경우 투수는 송진 가루로 볼의 표면을 닦는다. 미끄러움을 없애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묘한 동작 하나가 포착됐다. 양 손으로는 공을 닦으면서, 힐끗 뒤를 돌아 유격수와 3루수의 위치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박희수가 공을 닦으며 유격수, 3루수 위치를 체크하고 있다.          Sky Sports 중계화면   

카운트 1-2였다. 승부구를 더 미룰 필요가 없는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투수는 마음 속에 결심을 굳혔다. 다음에는 결정구로 경기를 끝내겠다. 그리고 그걸 던지기 위해 무심결에 (예상되는 타구 방향에 대한) 수비 시프트를 점검한 것일 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치자. 그래도 타자가 알아채지 못하면 그뿐이다. 어쩌면 대부분은 긴박한 순간에 아무 생각 없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타석에 있는 게 누군가. 유격수 아닌가. 그것도 센스로 치면 리그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다. ‘유격수하고, 3루수를 체크해? 그렇다면 바깥쪽 체인지업은 아니라는 얘긴가?’ 그런 추리가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그 대목에서 박희수가 구사할 수 있는 공은 많지 않다. 좁히면 2가지 중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 ① 주무기인 외곽쪽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던가, 아니면 ② 몸쪽에 빠르게 붙여서 꼼짝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①은 3구째에 써봤다. 하지만 타자가 끌려나오지 않았다. 연달아 쓰는 것도 좀 그렇다. ②로 가는 것이 활용폭이 넓다. 만약 존에서 빠지면 5구째 다시 ①의 방식을 쓰면 된다. 이를테면 ‘in-out’으로 흔들기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앞 타자 서동욱도 헛스윙한 걸 보니 오늘 직구의 볼 끝이 괜찮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글로 설명하니 장황할 뿐이다. 이런 정도의 상황 판단은 김선빈 급의 센스면 1초도 안돼 이뤄질 수 있다. 즉, 투수의 시선 처리 하나로 다음 공에 대한 예측의 신뢰도가 급증한다는 사실이다.

포수 이재원이 처음에는 변화구를 요구하다가, 결국 몸쪽 직구로 사인을 바꾼다. Sky Sports 중계화면

실전을 보자. 4구째에 대한 포수 이재원의 첫번째 사인은 손가락 2개였다. 체인지업일 것이다. 반복해서 이 사인을 냈지만 박희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결심한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재원은 사인을 바꿨다. 검지 하나, 그리고 엄지로는 몸쪽 신호를 줬다. 그제서야 투수가 움직임을 시작한다. 포수는 타자 쪽으로 다가앉는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9번타자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왼쪽 다리의) 레그 킥을 아낌없이 오픈한다. 그리고 몸쪽에서 약간 가운데로 몰린 139㎞짜리를 완벽한 타이밍에서 반사시켰다.

영화 <YMCA 야구단> 중에서

다시 영화 <YMCA 야구단>으로 돌아가보자. 주인공 이호창(송강호 분)은 부친에게 호되게 당한다. ‘선비가 그 따위 이상한 짓(베쓰볼)이나 하고 있다’는 꾸지람이었다. 강제로 낙향해 훈장으로 소일하던 중 일본군과의 경기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출동한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패색이 짙던 9회 말 2사 1루였다(공교롭게도 어제, 25일 게임과 똑같다). 감독(김혜수)은 급히 타임을 걸고 대타로 투입한다. 결과는 투런 홈런. 역시 학다리 타법이라는 레그킥 동작이었다.

이호창(송강호)은 이 작품에서 몇가지 명대사를 남긴다. 그 중 하나가 이거다. “난 4번 안하오, 죽을 사(死) 아니요.” 어쩌면 그래서 탄생한 것이 '조선의 9번타자'일 지도 모른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