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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이소룡의 33년, 우리에게 남긴 것

반재민 입력 2017.07.22.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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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짐=반재민 기자] UFC 라이트 헤비급에서 가장 압도적인 타격술을 자랑했던 존 존스, 화려한 킥으로 UFC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내기도 한 앤소니 페티스, 이 두 선수는 한 사람을 향해 최고의 사나이라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인물은 바로 70년대 당시 중구난방으로 갈려져있던 무술계에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으며, 역동적인 무빙과 빠르고 강한 타격, 상대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격투기술로 사나이들의 가슴을 울렸던 ‘브루스 리‘ 이소룡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4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그가 남겼던 발자취가 강하게 남아있다. 서른셋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남아있을까? 그리고 현대 무술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바람처럼 살다간 이소룡의 생애에 대해 조명해보려 한다. 

■짧았던, 그랬기에 더 강렬했던 이소룡의 삶

이소룡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 어머니인 하애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소룡의 정확한 국적은 미국이며 중국계 미국인이다.

아버지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본명은 이진번이지만, 경극무대의 대사였던 “대룡이 소룡을 낳는다.“에서 유래한 소룡이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지었다.

그의 무협영화를 본 당시의 사람들이라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어린 시절 이소룡은 매우 나약했다. 그가 무술을 시작한 계기도 몸이 약해서였다. 그의 나이 7살이 되던 즈음 아버지의 권유로 태극권에 입문한 이소룡은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하면서 영춘권, 채리불권 등을 익히며 본격적으로 무술을 익히게 되었지만, 끈기가 부족해 제대로 배운 무술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학창시절에는 배운 무술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고 동급생들과 싸움을 벌이는데 배운 무술을 쓰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나이 19살이 되던 1959년, 이소룡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누나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게 되었다.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소룡에게 남은 것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던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자신을 닦아나갔다. 고교과정을 모두 마친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입학한 이소룡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무술배우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철학서적을 읽는 이소룡, 그의 철학은 그의 무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자신이 배웠던 무술뿐만 아니라 복싱과 유도, 태권도 등 다양한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 이소룡은 펜싱 등 무술과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종목들도 배워나가며 자신의 무예를 갈고 닦았다. 이때부터 각종 서적 등을 통해 새겨진 자신의 철학을 무술에 접목시키는데 집중했는데 이게 바로 절권도의 기초가 되는 진번쿵푸(이소룡의 본명은 이진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이소룡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유명했지만, 낯선 땅 에서는 그저 무명의 동양인 배우일 뿐이었다. 결국 배우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이소룡은 롱 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았고, 여기에서 그를 눈여겨본 ‘배트맨’의 제작자이자 세계적인 프로듀서 윌리엄 도지어에 의해 여러 드라마에서 조금씩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말로우> 등 여러편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고, 이따금 무술지도자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소룡에 대한 헐리우드의 편견은 생각보다 심했고, 자신이 구상한 <전사>라는 작품은 경영자들에 의해 무시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높았던 미국의 벽에 좌절하고 있던 이소룡은 홍콩으로 건너가게 된다. 

홍콩에서 이소룡의 혼은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올랐다. 미국에서 홍콩으로 온 그를 처음으로 반겼던 이는 가화오락유한공사, 즉 골든 하베스트를 세운 추문회였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했고, 그의 전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망유희에서의 이소룡 왼쪽은 LA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농구선수 카림 압둘자바>  

1971년 홍콩에서의 첫 작품이었던 당산대형의 성공으로 스타반열에 오른 이소룡은 이듬해인 정무문을 통해 본격적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후 이소룡은 협화전영공사라는 영화사를 스스로 설립하고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까지 맡은 맹룡과강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영화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하고 후반부 촬영을 하였으며 이후 이소룡에게 전설로 남을 대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용쟁호투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이소룡의 전성기는 강렬했지만, 너무나도 짧았다. 용쟁호투의 촬영을 마무리한 1973년 7월 20일, 그는 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가 죽기직전 복용했던 진통제가 원인이었다고 의학계에서는 이야기했다. 용쟁호투가 개봉하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가 촬영을 마치지 못한 사망유희는 대역 故 김태정이 대신해 이소룡이 채우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완성했고, 사망유희는 비록 반쪽짜리이지만, 이소룡의 유작으로 남았다. 

<엽문에게 영춘권을 사사받은 젊은 날의 이소룡>  

 ■ “자신의 경험으로 연구해라, 유용한 것을 흡수해라, 쓸모없는 것을 거부해라, 본질적으로 자신의 것을 만들어라” 

그가 무도계에 있어서 끼친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동양무술에 새지평을 연 것이 그의 무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무술, 절권도는 실체는 있지만 이름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려운 무술이다. 이소룡도 생전 절권도라는 단어를 싫어했으며, 단지 ‘과학적 스트리트 파이트’ 라는 표현을 통해 그의 무술을 규정하려 했다. 

이소룡이 만들어낸 절권도의 모태가 되는 것은 영춘권과 채리불권이지만, 이외에도 유도나 복싱, 태권도, 심지어 펜싱에도 모티브를 두고 있을 정도로 이소룡의 무술이 현재의 종합격투기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무술계는 배타성과 독립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모든 유파가 스스로의 전통을 지켜나가는데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유파가 아닌 다른 유파들은 모두 적이라는 인식을 가졌고, 당연히 교류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소룡은 대학시절 탐독했던 여러 가지의 서적들을 통해 궁극적인 강함(Strength)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각 유파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전에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UFC 등 이종격투기가 대중화 되면서 무술종목간의 장벽은 이전보다 낮아진 편이다. 하지만 19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이소룡의 생각은 무도가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어왔고, 중화권의 무술계는 이소룡을 이단아로 낙인찍었다. 그는 대부분의 파이오니어(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질시와 박해에 시달렸다. 이 때 이소룡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무술 철학을 대중들에게 설파하려 했다. 

이소룡이 절권도에 불어넣으려 한 철학은 두 가지였다. 먼저 무술의 형식보다는 무술의 목적을 중요시했다.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에 초점을 맞춘 것이 바로 절권도가 추구하는 첫 번째 철학이었다. 떄문에 이소룡은 각 무술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없앴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기술에만 초점을 두었다. 가령 무술에 준비동작이 있다면, 절권도는 이러한 준비동작이 없이 바로 상대에게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그가 주연을 맡았던 정무문이나 맹룡과광, 용쟁호투 등의 작품을 볼 때 이소룡의 싸움은 기존의 싸움과는 다르게 동물과 같이 빠르고 정확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소룡이 보여준 빠르고 강한 액션에 놀라움과 존경심을 나타냈고,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열광하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철학보다 이소룡이 더욱 강조한 두 번째 철학은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었다. 이 철학이 바로 용쟁호투 속에 녹아있는 요소인데 여동생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원인이었던 ’미스터 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격투 토너먼트가 펼쳐지는 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이소룡은 한 호주인이 동양인들에게 시비를 걸자. "Fighting Without Fighting" 이라는 한 단어와 함께 호주인을 작은 배에 태워 물을 먹이는 장면이 그 예이다. 이 장면은 16세기 일본의 유명한 검술대가, 츠가하라 보쿠덴의 일화를 각색한 것인데,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이소룡의 격투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소룡은 남들을 따라하는 무술이 아닌 남이 따라하게 되는 무술을 점차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설파한 이소룡의 트레이닝 모습>  

■ “격투에 대해 논하고 싶다면 당신은 신체의 모든 부위를 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소룡은 무술계에서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데 무도가들 중 웨이트 트레이닝을 최초로 강조한 사람이 바로 이소룡이라는 사실이다. 이소룡의 이전까지 유도, 가라테 등 각종 무술은 체계적이지 않고 자연과 하나되는 수련을 통해 자신의 몸을 단련해왔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웨이트 트레이닝은 보디빌딩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소룡은 여타 다른 무도가들과는 달리 웨이트 트레이닝에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소룡이 당시 실행했던 웨이트 트레이닝은 바벨 스쿼트, 바벨 풀 오버, 바벨 벤치 프레스, 바벨 컬, 등 현재까지도 피트니스 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단련해나갔다. 

그리고 실전 무술에 응용하기 위한 덤벨 쉐도우 복싱 훈련도 했는데, 덤벨을 쥔 상태로 12세트, 한 손 당 각 100회의 펀칭을 했다. 그리고 덤벨의 무게는 1세트 0.5kg부터 시작해 6세트에는 5kg의 덤벨을 쥐고 복싱연습을 했으며, 7세트부터는 5kg 시작으로 12세트에는 0.5kg으로, 이후는 빈손으로 펀칭연습을 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소룡이 최초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중시한 무도가는 아니다. ‘최배달’로 유명한 최영의 등 무술의 고수들 역시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동양무술을 본격적으로 서양으로 영향을 준 인물이 이소룡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가 웨이트 트레이닝 무술가의 선두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이소룡은 당시 첨단 요법인 EMS(Electric Muscle Stimulation, 전기근육자극요법)를 통해서도 근력을 향상시켜 나갔는데, 그는 전극을 온몸에 부착한 후 근육에 직접 전류자극을 주어 뇌의 기능 없이도 칼로리 소모와 근성장을 유도할 수 있었다. 즉, 근육이 뇌와 독립된 상태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게 만든 것이다. 몸이 EMS에 의해 운동이 되는 사이 이소룡은 뇌를 시나리오를 쓰고 시퀀스를 구상하며 비즈니스의 역량을 발휘하는 부분에 전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된 EMS 시스템을 70년대 초에 직접 시행할 정도로 이소룡의 트레이닝은 전과는 다르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이렇게 이소룡은 이외에도 다양한 운동을 통해 체계적이지만 혹독하게 자신의 몸을 만들어 나갔고, 결국 무술의 수련에 있어서도 웨이트 트레이닝이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일깨워준 선구자가 되었다. 

■ “불멸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억 될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33년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이소룡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그의 영화를 통해 많은 어린이들이 무술의 꿈을 키워왔고 실제로 격투기에 입문한 이들도 적지 않다. 셰인 카윈은 어린시절 우상이 이소룡이었으며, 다니엘 코미어와 존 존스도 이소룡의 모습에 큰 영감을 받았다 말할 정도로 종합격투기에서 이소룡이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또한 무술영화가 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소룡이었다. 이후 성룡, 홍금보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헐리우드에 진출했고, <폴리스 스토리>, <취권> 등 여러 가지의 무술영화 들을 성공시키며 8-90년대 무술영화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세계적인 게임회사인 EA는 UFC 공식게임인 UFC 3에서 이소룡을 특별 캐릭터로 만들며 그의 업적을 기렸고, UFC 회장인 데이나 화이트 이소룡을 두고 ‘종합격투기의 아버지’란 말을 하며 그를 칭송했다. 

출생부터 고난, 전성기를 거쳐 전설에 이르기까지 이소룡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이슈들을 던져주며 함께 호흡해왔다. 그의 죽음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그의 아내인 린다는 훗날 영화를 통해 이러한 명언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궁금해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고 싶다“

 종합격투기의 아버지이자 모든 무술인의 영웅, 스승으로 남아있는 이소룡, 그는 언제나 사람들 속에는 강렬하고 그리고 강했던 이소룡의 모습이 영원토록 남아있을 것이다.

사진=이소룡 공식 홈페이지, 이소룡 재단 홈페이지
글=반재민 기자(press@monstergroup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