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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자 코리언드림]너클볼 투수 피어밴드의 한국의 꿈

조회수 2017. 4. 21. 12: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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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시즌 KBO리그 초반에는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가운데 막내 kt 위즈의 선전도 눈길을 끕니다.

특히 평균자책점 3.36의 투수진이 마법사의 마술 지팡이가 되고 있는데, 선발진의 중심에 바로 이 선수 라이언 로버트 피어밴드(32)가 있습니다.

KBO리그에서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외국인 선수들의 이야기입니다.

마법사 복장이 잘 어울릴 것 같은 피어밴드의 2017시즌이 화려하게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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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23이닝 연속 무실점에 0.36의 평균자책점으로 놀라운 활약인 왼손 투수의 이야기

 2017시즌 KBO리그 초반에는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가운데 막내 kt 위즈의 선전도 눈길을 끕니다.

특히 평균자책점 3.36의 투수진이 마법사의 마술 지팡이가 되고 있는데, 선발진의 중심에 바로 이 선수 라이언 로버트 피어밴드(32)가 있습니다. 3경기에 선발로 나서 3연승을 거뒀고, 지난 두 경기는 9이닝씩을 꽉 꽉 채우며 무실점의 역투를 했습니다. 첫 경기에 7이닝을 던졌으니 3경기 평균 8이닝을 넘게 던졌습니다. 게다가 4월2일 시즌 첫 등판 2회에 SK 정의윤에 홈런으로 내준 1실점이 시즌 유일한 실점입니다. 23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이어가며 현미경 평균자책점 0.36을 비롯해 대부분 투수 기록에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2017시즌 투수 부문 돌풍의 진원지 피어밴드를 수원 kt Wiz Park에서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지난 시즌에 중단됐던 코리언 드림을 다시 시작합니다. KBO리그에서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외국인 선수들의 이야기입니다.>


3년째 KBO리그 시즌을 쾌조의 스타트로 시작한 피어밴드와 자신의 너클볼과 야구 인생, 한국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민기자닷컴


- 시즌 스타트가 아주 좋다.

▶기분 좋게 시작하고 있다. 나도 나지만 팀이 아주 좋은 시작을 하고 있어서 정말 기쁘다. 1위를 다투고 있지 않은가.


- 기대 이상의 선전이다. 팀의 이런 성적을 기대하진 못했을 텐데.

▶ 솔직히 캠프를 갈 때만해도 이 정도로 잘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캠프가 시작되고 시범 경기를 하면서 특히 우리 투수진과 수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뭔가 해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게 들었다.


- 뭐가 달라진 건가?

▶ 새 감독님은 여유가 있는 분이다. 선수들이 즐겁게 경기를 하도록 배려하신다. 그렇지만 동시에 경기를 존중하고 제대로 하라는 점을 강조하신다. 엉뚱하고 멍청한 짓을 하면 반드시 지적을 하신다. 그러면서 투수들도 여유를 가지고 피칭을 하고 있고, 특히 수비가 훨씬 좋아진 점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올바른 야구를 하고 있다.


- 그렇다면 피어밴드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웃음) 정말 대단한 스타트다.

▶ 지금까지는 좋다. (미소) 오프 시즌 동안에 준비를 많이 했는데 가장 큰 차이라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들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오래전부터 두 분은 내 너클볼이 아주 좋으니 조금 더 자주 사용하라는 말씀을 늘 하셨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국에 와서 작년에 넥센에서도 그렇고 아주 가끔 던지기는 했지만, 지난 오프 시즌 동안에 정말 너클볼 던지는 훈련을 많이 했다. 진짜 무기로 삼기 위해서. 그리고 캠프와 시범 경기에서 우리 포수들과 너클볼 호흡을 계속 맞춰가며 자신감이 생겼다. 포수들도 언제든 너클볼을 요구하고 잘 잡아주기 시작하니 내간 정말 큰 자신감이 생겼다.


- 작년까지는 너클볼을 던지기를 좀 꺼렸었다는 뜻인가?

▶ 그렇다. 사실 너클볼을 고등학교 때부터 던졌다. 그런데 시애틀 매리너스 프로에 들어가니 팀에서 던지지 말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내 강속구 구속은 151km를 넘나들었고, 체인지업은 지금보다 좋았다. 그 후에 토미존 수술도 했고, 너클볼은 거의 던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6년쯤 지나 다시 캐치볼 때나 조금씩 던지기 시작했다. 사실 너클볼은 팔에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에 팔 보호에도 도움을 준다.


- 넥센에서는 포수들이 부담스러워 해 잘 안 던졌다는 말도 돌았다.

▶ 노!!!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박동원은 너클볼을 잡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내가 자주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요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가끔 던지면 완벽하게 잡아줬다. 단지 내가 너클볼 던지는 훈련도 많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많이 던지지 않았을 뿐이다.


-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게 사실인가?

▶ 그렇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까지 투수셨고 아마추어 야구도 오래 하셨다. 야구는 우리 집안의 스포츠다. 할아버지는 오하이오 주 최고의 아마추어 심판이셨다. 프로 진출 기회도 있었는데 결혼을 하시면서 다른 직업과 심판을 하셨다. 당시만 해도 야구 선수는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정크볼(쓰레기공) 투수’라고 늘 그러시는데(웃음) 너클볼은 물론 커브와 다양한 변화구를 던질 줄 아신다. 삼촌도 고등학교 때까지 스타였는데 어깨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 두셨다. 집안 남자들 모두가 투수였다. 그런데 모두 우완이셨고 나만 왼손 투수다. (웃음)


- 그래서 아버지에게 너클볼을 배울 수 있었던 거로군.

▶ 그렇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갈 때까지도 아버지는 아마 야구를 하셨고 나는 늘 아버지와 캐치볼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내게 너클볼을 던지면 내가 그것을 흉내 내면서 배웠다. 요즘도 오프 시즌 훈련 상대가 없으면 아버지와 캐치볼을 한다. 내 공을 다 잡아주시니까. 형제가 없고 누나만 하나 있어 내 파트너는 늘 아버지셨다. 그러다가 정말로 마운드에서 불펜 피칭 등이 필요할 때는 모교에 가서 후배 포수들에게 용돈을 주고 훈련을 하기도 한다.


-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던데 아직도 그곳에 사나?

▶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시애틀과 계약하면서 결혼하고 스프링 캠프와 가까운 애리조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방출되고 필라델피아로 이적하니 캠프가 플로리다였다. 그래서 애리조나 집을 팔고 클리블랜드 인근에 집을 지었다.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겨울에 꽤 추운 곳이던데.

▶ 그렇다. 사실 한국이랑 기후가 똑같다고 나는 늘 말한다. 4계절에 겨울은 춥고 눈도 오고. 그래서 한국에 와도 계절은 너무 흡사해 고향에서 던지는 기분이다. (웃음)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 배운 너클볼을 지난 겨울 동안 다시 갈고 닦아 시즌 초반 돌풍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피어밴드 ⓒ민기자닷컴


- 너클볼 그립을 보여줄 수 있나?

▶ 물론이다. 난 손가락 세 개를 얹어서 던진다. R.A. 디키나 다른 너클볼 투수들은 두 손가락을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 팀 젊은 투수들이 그림 등에 대해 물어보면 난 늘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그립이 좋다고 말해준다. 실밥도 투심이나 포심으로 다른 형태로 잡기도 한다. 패스트볼과 마찬가지로 포심 그립과 투심 그립은 움직임이나 구속이 약간 다르다.


- 그런데 다른 투수들의 너클볼에 비해 구속이 약간 빠른 것 같은데.

▶ 사실이다. 그런데 시애틀 시절에 디키와 팀메이트였다. 캐치볼을 하곤 했는데, 디키는 거의 130km 가까이 빠른 너클볼을 던졌다. 내 너클볼보다 더 빨랐다. 웨이크필드나 다른 너클볼 투수들은 110km 대를 던졌는데. 놀라운 건 디키는 너클볼은 빠른 구속에도 움직임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내 너클볼은 그 정도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좌우로 움직이고 떨어지기는 하지만 다른 너클볼보다는 움직임이 덜하다.


-그래서 너클볼 제구가 더 좋은 건가? 던지는 투수도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너클볼인데.

▶ 그런 것 같다. 디키나 웨이크필드만큼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에 내가 어느 정도 제구에 자신이 있다. 그래도 포수에게 정 가운데 미트를 대달라고 하고 던진다. 공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때문에 코너를 찌를 자신은 없다. (웃음)


- 올 시즌 던진 너클볼이 모두 스트라이크였다는 기록을 봤는데 사실인가? (웃음)

▶ 아니 그럴 리가. (웃음) 첫 두 경기에서 합쳐서 65개의 너클볼을 던졌고 지난 LG 경기에서는 15개만 던졌다. 그 경기에서는 내 속구가 좋았다. 9회에도 145km쯤 나왔는데 경기 후반에 그렇게 던진 건 오랜만이다. 내 생각에는 너클볼을 던지면서 팔의 힘을 비축했기 때문에 경기 후반에도 빠르게 던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총 한 80개쯤 던졌고 그 중에 60개 정도가 스트라이크였던 것 같은데 아주 만족할만한 비율이다.


- 언제 야구를 처음 시작했나?

▶ 4살 때 처음 야구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는 티볼이 아니고 공을 던지고 치는 리그였다. 나이가 어렸지만 나는 그때도 또래보다 꽤 잘했고 할아버지가 오하이오 야구계에서는 아주 유명하신 분이라 나보다 나이 많은 애들의 리그에 넣어주셨다. (웃음) 할아버지는 심판장이셨다. 그때 이후로 여름마다 야구를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아, 토미존 수술을 받은 해(2009년)만 빼고.


-언제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나.

▶ 아마 중학교 2,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왼손 투수였고 또래보다는 훨씬 잘 했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고 싶었다. 미드뷰 고등학교(4년제) 들어가서도 1학년 때부터 주전 팀에서 뛰었는데 내가 살던 카운티에서 유일한 1학년 주전이었다. 15세이던 고2때는 구속이 142-143km까지 나왔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키가 지금과 같다. (190cm) 훨씬 말랐었지만. 구속은 계속 빨라졌고, 고3 첫 훈련 때는 19명의 대학과 프로 스카우트가 나를 보러왔었다.


- 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나?

▶ 사실 켄트스테이드 대학에 야구장학생으로 갈 예정이었다. 플로리다의 2년제 대학에서도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애틀이 3라운드에 나를 뽑았고, 결국 프로행을 선택했다. 사이닝 보너스도 꽤 많았다. 17세였던 내게는 처음 보는 큰 액수였고, 아버지는 자신이 10년 걸려 벌 돈을 내가 15초 만에 계약해서 받았다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다. 팀에서는 대학 교육비도 보장했었다.


- 17세에 프로 선수가 됐는데 너클볼을 못 던지게 한 것은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다.

▶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너클볼을 고집했다가 5년도 안 돼 야구를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이제 15년째 야구를 하고 있고, 지난 3년간은 정말 제대로 많이 던지고 있다. 그거면 된다.


- 메이저리그 데뷔전과 첫 승리 중 어떤 게 더 기억에 남나.

▶ 아, 아무래도 첫 경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2006년 9월에 더블A 샌안토니오에서 뛰다가 처음으로 콜업됐고, 토론토전에 0-10인가 지고 있을 때 구원 등판했다. 2이닝 동안 삼진 두 개 잡고 완벽히 던졌다. 그리고 첫 승은 2007년 (6월3일)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7⅔이닝 동안 4실점하고 승리 투수가 됐었다.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 벌써 10년 전이라니. (웃음) 양키즈전에서의 두 번째 승리도 기억한다.(2008년) 2점을 내줬는데 데릭 지터와 랜스 닉스에게 맞은 홈런이었다. 그 시리즈는 우리가 스윕했었다.


- 빅리그에 간다고 처음 통고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 나는 더 이상 기쁠 수가 없었지만 아내는(당시는 약혼녀였지만) 반반이었다. (웃음) 더블A 시즌이 끝나는 날에 감독이 불러 “내일 빅리그로 간다,”고 바로 말해줬다. 우리는 시즌 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고, 나는 시즌이 끝나면 바로 가서 같이 준비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빅리그 승격이라니. 그래서 전화를 해 내일 집으로 못 간다고 했더니 처음에 화를 내려다가 내가 드디어 메이저리그에 간다는 소식에 정말 기뻐했다. 준비 제쳐놓고 캔자스시티로 경기를 보러 왔었고. 아버지도 정말 기뻐하셨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는 온 가족들이 정말 축하해주고 기뻐했었다. 나는 21세까지 메이저에 가는 게 목표였는데 21번째 생일을 3주 지나고 처음 빅리그에 올라갔다.


- 2009년 팔꿈치 수술도 했고 그 후로 기회도 많지 않았다. 빅리그에 안착하기가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

▶ 빅리그에 올라가는 건 정말 어렵다. 경쟁이 너무도 치열하다. 그러나 빅리그에 머무는 것은 그것보다 더욱 어렵다고들 말한다. 2008년부터 팔꿈치에 문제가 있었지만 재활로 버티다가 결국 수술을 했다. 2008년에 빅리그에서 8번 선발로 나섰지만 나는 기복이 있었다. 잘 던지다가 부진하기도 하고. 그래서는 빅리그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KBO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도 마찬가지다. 계속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 기복이 있으면 버티기 힘들다. 나는 꾸준하지 못했고, 그리고 수술 후에 다시 구속을 회복하는데 2년 반이 걸렸다. 2012년에 독립리그에도 갔었고 2013년 텍사스와 마이너 계약을 해서 텍사스 올해의 마이너리그 투수가 되면 재기에는 성공했다. 결국 2014년 7월에 텍사스에서 다시 빅리그에 올라갔지만 안착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15년에 넥센의 제안으로 KBO리그에 오게 됐다.


- 한국행은 갑작스런 결정이었나?

▶ 그렇다. 넥센에서 내게 제안한 계약은 4일 만에 결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실은 2014년 시즌 중반에 한화에서 제안을 받았었는데 레인저스가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시즌에 끝나고 넥센이 다시 제안했고 아내와 상의해 결정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겐 축복이었다.


- 어떤 마음으로 결심을 한 건가?

▶ 그 전에 한화에서 뛴 브라이언 배스가 친구다. 자신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정말 즐거운 추억이라고 말했고, 다른 한국에서 뛴 많은 선수들과도 이야기를 했는데 모두 좋은 이야기로 추천을 했다. 내게는 새로운 시작이었는데, 지나고보면 가족들도 한국 생활을 아주 좋아하고 좋은 결정이었다. 5월에 가족들이 오는데 아들은 벌써 주변에 한국에 간다고 자랑하고 다닌다고 한다. (웃음)


- KBO리그의 첫 인상은 어땠나.

▶ 아주 다르다는 것. 정말 달랐다. 그래서 첫 해에는 내가 미국에서 알던 모든 야구를 떨쳐버리는 것이 힘들었고 좀 고전했다. 같은 야구지만 정말 다른 야구를 한다. 코치님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고 KBO에서 오래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할지 고민도 많았다. 결국 포수를 믿고 새 야구를 배우면서 적응해나갔다.


- 작년에 갑자기 방출됐을 때는 힘들었을 텐데.

▶ 앤디 (밴헤켄)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고 그는 아주 좋은 투수이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앤디가 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미안하다고 하기에, 비즈니스인데 미안할 게 뭐가 있냐고 했다. 그는 외국인 왼손 최다승 투수 아닌가.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했고 투수 여러 부문에서 꽤 괜찮은 기록을 올리고 있었고, 야구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kt에서 곧바로 내게 기회를 주었다. 한국에서 내 첫 번째 집은 넥센이었고, 이제는 kt가 나의 집이다. 이곳에서 다시 성공할 기회를 잡았고 코칭스태프와 투수 코치님도 정말 좋고, 동료들 역시 최고다.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 오프 시즌 kt와의 재계약 과정이 아주 순조롭지는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 (웃으면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에이전트에게도 미리 말했지만 나의 최우선 선택은 kt와의 재계약이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과제가 남았다고 생각했고, 나는 우리 팀을 도울 자신이 있었다. 젊은 투수들도 내게 의지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주 가까워졌다. 꼭 돌아오고 싶었다. 그리고 캠프 1주일 정도 남기고 재계약이 결정됐고, 정말 기뻤다. 팀에서 좋은 결정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고, 시즌 시작이 나쁘지 않아서 기쁘다.


- 투수로서 더욱 발전하고 있는데 MLB에 대한 미련은 없나.

▶ 현재로서는 한국에서 은퇴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만약 MLB에서 제안이 온다면 그건 빅리그 개런티 계약이어야 한다. 나도 가족도 한국을 정말 좋아하고 음식이며 문화며 모두가 정말 즐겁다. 그리고 KBO리그에서 나는 경쟁력을 가지고 열심히 던지고 있다.


피어밴드의 너클볼 그립은 세 손가락을 이용하는 등 독특합니다. 스피드와 움직임이 특이해 타자들에겐 골칫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민기자닷컴


-너클볼 외에도 작년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나.

▶ 자신감. 마운드에서 훨씬 자신이 있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어떻게 타자를 잡아야할까 생각하기 보다는 포수의 사인을 믿고 최고의 공을 던지려고 한다. 그리고 내 성공의 많은 부분은 수비 덕분이다. 내가 좋은 투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비가 아웃을 잡아주기 때문에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 운동장으로 운전하고 오면서 에릭 테임즈 생각과 함께 피어밴드가 뒤를 잇는 것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웃음)

▶ 테임즈는 정말 대단하다. 동료들과도 테임즈 얘기를 많이 한다. 오늘은 안타가 없더니 볼넷을 3개나 골랐더라. 내셔널리그에서는 출루가 아주 중요한다. 정말 잘하고 있고, 계속 잘하길 바란다. 정말 대단하다.


- 아직 이르지만 은퇴 후의 삶도 생각하나.

▶ 아, 물론이다. 영원히 뛰는 선수는 없다. 나는 20년간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다. 올해가 15년째니까 5년이 남았다. 내 몸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지만 경쟁력이 있을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끝나면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다. 한국에서 코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젊은 투수들이 내게 조언을 구하고 하는데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 한국말은 많이 늘었나.

▶ 노력은 하는데 쉽지 않다. (웃음) 과외 선생님을 구할까도 생각 중이다. 많은 한국 선수들이 내게 영어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나도 한국말을 배워 그들과 한국어도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주 어려운 언어지만 완전한 문장으로 대화를 못해도 단어 등을 익히며 계속 노력할 것이다.


- 한국은 피어밴드에게 어떤 의미인지.

▶ 모든 것이다. 나의 삶이다. 지난 3년간 미국보다 한국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1년에 7,8개월을 한국에서 지낸다. 이제 한국은 나의 삶이다. 그리고 나의 가족이다. kt는 나의 가족이다. 외국인 선수는 팀에 셋밖에 없고 서로 대화하고 잘 지내지만, 나머지 동료들과도 모두 즐겁게 소통하며 지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모두 친구라기보다 내 가족이다.


- 올해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가.

▶ 늘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건강하면 나머지는 따라온다고 믿는다. 다른 게 있다면 감독님이 원하듯이 180-200이닝을 던지고 싶다. 첫 해 177이닝, 작년에 182이닝을 던졌는데 올해는 더 많이 던지고 싶다. 매번 9이닝을 던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갈 때마다 6이닝 이상 3실점 이하로 막아내는 게 목표다.



평소 과묵한 편이지만 목표가 확실하고 팀에 녹아들려는 노력을 하는 선수인 라이언 피어밴드는 3년차가 되면서 훨씬 편안하고 자신 있어 보입니다. 물론, 초반 놀라운 상승세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너클볼을 장착하고 정상을 찾은 스트라이크존의 혜택까지 이용하면서 놀라운 기세의 스타트를 끊고 있습니다. 마법사 복장이 잘 어울릴 것 같은 피어밴드의 2017시즌이 화려하게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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