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모의 respect] 구단 '직원'도 레전드가 되는 축구 문화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최종 지역예선 결과로 웃고 울었던 이번 주, 영국의 국영방송 BBC는 한 '티 레이디'(Tea lady : 차 시중드는 사람)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파했다. BBC의 보도가 나온 이후 데일리메일, 더 선 등 현지 언론에서도 거리에서 판매되는 신문을 통해, 또 온라인 보도를 통해 고인의 별세 소식을 다뤘다.
이 뉴스의 주인공이자 이제는 고인이 된 인물은 현재 잉글랜드 2부 리그에 소속된 클럽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52년간 클럽의 감독, 선수, 취재기자 등에게 차를 따라주던 캐스 캐시디라는 이름의 한 평범한 '직원'이었다.
메시의 4경기 징계와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탈락 위기, 네덜란드의 세대교체 실패, 호날두의 새로운 골기록 등 영국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이슈가 넘쳐났던 와중에 잉글랜드 2부 리그의 한 직원의 사망 소식에 대해 그 국가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언론사인 BBC가 보도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 또 유럽에서는 구단의 '직원'도 얼마든지 '레전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렇게 구단 '직원'도 레전드가 될 수 있는 축구 문화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1. 뉴캐슬의 '레전드'가 된 52년 '티레이디' 캐스 캐시디
캐시디 씨가 처음 뉴캐슬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의 일이었다. 그녀의 직책인 '티레이디'라는 것은 '차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마찬가지로 팀의 주요 경기 등이 있을 때마다 감독, 선수, 취재기자 등에게 차를 건네주고 인사를 나누는 일이다. 실제로 잉글랜드에서 취재를 하다보면 크게 눈에 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항상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다.
BBC는 28일(현지시간) 보도에서 캐시티 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뉴캐슬의 전설적인 티레이디 캐스 캐시디가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캐시디는 1963년부터 뉴캐슬에서 티레이디로 일하다가 2015년에 은퇴할 때까지 뉴캐슬의 감독, 선수, 취재기자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뉴캐슬은 그녀의 은퇴 소식을 공식적으로 알린 후 바로 다음 경기에 그녀를 특별히 초대하기도 했다."
그녀가 52년 동안 일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도 각각 공식 홈페이지와 공식 SNS 채널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소식을 전했다.
"캐시디는 세인트제임스파크(뉴캐슬의 홈구장)에서 아주 많은 사랑을 받은 일원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녀의 밝은 미소와 조르디식 말투(뉴캐슬 지역의 사투리), 그리고 그녀가 건네주는 따뜻한 차는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뉴캐슬 공식 홈페이지)
"우리 클럽은 우리가 아주 사랑했던 전설적인 티레이디 캐스 캐시디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아주 큰 슬픔에 잠겨있다."
영국 언론을 통해 보도된 소식만으로는 그녀가 티레이디로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별세 소식에 대해 살아생전에 그녀를 알았던 많은 레전드 선수들 및 기자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가늠할 수는 있을 것이다.
뉴캐슬 감독으로 활약했던 영국 축구계 레전드인 케빈 키건은 그녀에 대해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고 프리미어리그 최다득점 기록 보유자 앨런 시어러는 "그녀와 같은 사랑스러운 사람을 알았던 것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녀가 뉴캐슬에서 근무했을 당시 뉴캐슬에 직접 취재를 가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고 밝힌 데일리메일의 크레이그 호프 기자는 그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데일리메일을 통해 공개된 기사를 통해서 캐시디 씨를 '언성히어로'(Unsung hero : 이름없는 영웅)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그녀라는 사람 하나 뿐이었다."
2. 발렌시아의 '55년' 킷맨과 스토크의 레전드가 된 '광대'의 이야기
캐시디 씨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그녀에 대한 추모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서슴없이 그녀를 '레전드' 혹은 '이름없는 영웅'이라고 부르는 영국 언론과 축구팬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각각 1, 2년 전에 비슷한 배경과 과정으로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는 두 사람으로 각각 발렌시아와 스토크에서 '킷맨'(유니폼 등 소품담당)으로 평생을 일한 끝에클럽으로부터 '레전드'라는 칭호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 은퇴했던 베르나르도 에스파냐씨와 닐 볼드윈 씨다.
3. 축구를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 하나가 '레전드'로 인정받는 문화가 자리잡기를 바라며
각각 뉴캐슬, 발렌시아, 스토크 시티라는 한 축구 클럽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열정으로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한 클럽을 위해서만 일했던 캐시디, 에스파냐, 볼드윈 세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훈훈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스타 선수도 아니고 감독도 아닌, 그런 일반 직원들 하나 하나에게까지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언론과 팬들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 이 칼럼을 읽고 있는 한국의 축구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의 축구계에도 이런 문화가 자리잡기를 희망한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축구가 최고의 인기 스포츠 종목인 영국이나 유럽처럼 단숨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자라난다면 우리가 축구를 단순히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로, 인생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3월 3일 [한국일보]의 윤태석 기자가 보도한 "한, 중 축구 역사를 바꾼 윤형진 씨를 아시나요"라는 기사에는 '민간조사요원'이라는 신분으로 한국의 축구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2007년에 동남아로 향했던 윤형진 씨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해당 기사에 의하면, 윤 씨는 축구협회 직원이 아니며 현재는 학원에서 수학을 강의하는 강사지만 축구 역사에 대한 강한 관심과 열정으로 한국대표팀 최초의 국제경기인 1948년 7월 6일 홍콩전의 첫 득점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등(고 정남식 선생),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리에서 한국 축구를 위해 큰 역할을 해냈다.
나는 한국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캐시디, 에스파냐, 볼드윈, 그리고 윤형진 씨같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축구 문화가 앞으로 그런 사람들을 더 발굴하고 그런 사람들의 공로를 서로 더 치하하고 박수쳐주는 문화가 만들어지길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칼럼의 주인공인 캐시디 씨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보자. 그녀의 별세 소식을 전한 '데일리메일'의 기사에는 총 29개의 코멘트(댓글)이 달렸는데, 그 중 가장 많은 라이크(좋아요)를 받은 댓글에는 이런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이 팬의 남긴 137명의 팬의 동의를 얻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이번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축구라는 스포츠를 축구답게 만드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가 그녀에게 어울리는 인정을 받는 것이 보기 좋다.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그냥 잊혀지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나.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안녕하세요 축구팬 여러분, 축구 칼럼니스트 이성모입니다.
저는 이번 칼럼에서 소개해드렸던 캐시디 씨, 에스파냐 씨, 볼드윈 씨, 그리고 한국의 윤형진 씨 같은 축구계의 숨어있는 보석과 같은 분들에 대한 소식을 축구팬 여러분께 전해드리는 것에 늘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이런 사연을 가진 분을 알고 계신다면 언제든 저에게 제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직접 만나고, 직접 만날 수 없다면 통화나 서신을 통해서라도 제가 직접 취재해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성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