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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비키니]공갈포여, 영원하라

입력 2016.07.1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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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넷 출루는 타자의 수치로 여기며.. '모 아니면 도' 대쪽같은 스윙 고수당당한 공갈포 정신 무시했다면 홈런왕 장종훈-박병호 탄생 불가능공갈포 계승자, 최승준에게 주목을
[동아일보]
투수가 어느 코스로 어떤 구질의 공을 던지든 자신이 정한 타격 포인트 한 곳을 향해서만 힘차게 휘두르는 타자들이 있다. 야구팬들이 ‘공갈포’라고 부르는 타자들이다. 스윙이 공갈(恐喝·공포를 느끼도록 윽박지르며 을러댐)같이 느껴진다는 의미다. 사람을 상위 1% 아니면 개돼지로 나누는 건 잘못이지만 이들이 ‘모 아니면 도’ 자세로 타격을 하는 걸 탓할 수는 없다. 이들의 특징은 대체로 이렇다.

▽안타 가운데 홈런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홈런이 아닌 이상 공갈포들에게 안타는 별 의미가 없다. 분리배출을 하는 것도 아닌데 ‘안타는 쓰레기’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들의 스윙은 언제나 힘차고 날카롭다. 공이 와서 맞을 뿐 애써 맞히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공갈포들에게 패배는 자신의 타구가 야수에게 잡히는 게 아니다. 승리의 주체도 패배의 대상도 모두 자기 자신일 따름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투수에게 삼진을 당하는 것이지만 공갈포들에게는 어차피 죽을 거 제자리에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래서 공갈포들은 삼진을 수치(羞恥)로 여기지 않는다.

▽거꾸로 볼넷은 수치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뿌리는 쳐다보지 않고, 이들은 출루율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볼넷을 얻어 공짜로 1루까지 걸어 나가기보다는 타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갈포의 가장 큰 미덕이다.

최승준
그저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공갈포 지수 역대 1위(표 참조) 이성열(32·현 한화)은 2013년 시즌 초반 홈런 선두를 달렸다. 당시 전반기를 끝냈을 때 홈런은 16개로 그해 홈런왕 박병호(30·당시 넥센)보다 겨우 3개 적었을 뿐이다. 후반기에는 홈런 2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지만 그건 이성열의 잘못이 아니었다. 후반기에 공이 와서 맞지 않았을 뿐이다.

공갈포 지수 역대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퀸란(48)은 어떤가. 그는 현대 소속이던 2000년 개막전에서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팀 한화를 상대로 홈런 3방을 쏘아올리며 대전구장을 초토화했다. 그해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도 리버스 스윕(시리즈 패배 위기에 몰린 팀이 역전 우승을 거두는 일)을 꿈꾸던 두산의 기세를 홈런 두 방과 6타점으로 짓밟아 버린 것 역시 ‘공갈포 정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2002년 LG 유니폼을 입게 된 뒤에도 퀸란은 3루수 수비에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면서도 타석에서는 전체 아웃 카운트 중 51%(21개 중 10개)를 삼진으로 기록하는 대쪽같은 면모를 보여 줬다.

퀸란의 공갈포 정신은 현대의 사실상 후신인 넥센으로 이어졌다. LG에서 팀을 막 옮긴 2011년 박병호의 공갈포 정신을 무시했더라면 넥센은 홈런왕 박병호를 얻을 수 없었다. 박병호만 그런 게 아니다. 왕년의 홈런왕 장종훈(48·현 롯데 코치) 역시 1989년 당시로서는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공갈포 지수 45.1을 기록했다. 장종훈은 이듬해(1990년) 홈런 28개로 생애 첫 홈런왕에 올랐고, 1991년 35개, 1992년 42개로 해마다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새로 썼다.

그러니 야구팬들이여, 역대 공갈포 지수 4위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올 시즌 최승준(28·SK)에게 주목하라. 그가 머잖은 미래에 홈런왕을 차지한다고 해도 놀라지 마시라. 최승준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공갈포 정신을 가장 훌륭하게 잇고 있는 계승자다. 공갈포 만세, 공갈포여 영원하라!

황규인 기자 페이스북 fb.com/bigk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