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레전드] 원로 축구인 서윤찬 "그 때 그 슈팅이 골대를 맞지 않았다면 한국축구의 역사는 달라졌다"

김석현 선임기자 입력 2013. 3. 25. 17:02 수정 2013. 3. 25. 17: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축구 100년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서윤찬

일본의 스포츠인들이 늘 자랑으로 내세우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1964년 자국의 수도 도쿄에서 열렸던 제18회 하계올림픽에서 금 16, 은 5, 동 8개로 종합 3위에 오른 것이 첫 번째 자랑이고, 세계 야구의 국가 대항전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2연패를 달성한 것이 두 번째 자랑거리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내세우는 세 번째 자랑거리는 무엇일까.

1968년 10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9회 하계올림픽의 축구 3~4위전에서 홈팀 멕시코를 2-0으로 꺾고 차지한 동메달.

당시만 해도 아시아 축구는 세계 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돼 존재가치가 미미하던 터라 월드컵 다음 가는 세계축구의 커다란 이벤트인 올림픽에서 3위에 올라 동메달을 획득한 것은 그들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요, 다른 아시아 국가의 입장에서는 부러움을 넘어 질시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일본축구가 이 같은 역사적인 경사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한 가지 중대한 '매개(媒介) 요인'이 있었다. 그 중대한 매개 요인을 제공한 당사자가 바로 한국축구였던 것.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그 때 그 볼'이 일본의 크로스바에 맞지 않고 네트 안으로 들어가기만 했다면, 일본 대신 한국 축구가 멕시코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물론 한국이 그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능가하는 다른 '역사'를 만들어 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원로 축구인 서윤찬(72ㆍ전 동아고 감독)이 지금껏 "우리가 세계축구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다 "며 아쉬워 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46년 전의 일을 두고 서윤찬이 이토록 아쉬워하는 이유는 뭘까.

이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서윤찬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 두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서윤찬은 1960년대 중ㆍ후반, 한국 축구대표팀 부동의 링커로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는 허리의 역할을 담당했던 추억의 스타플레이어다.

올드 축구팬 중에서도 아주 나이가 많은 분이 아니면 기억을 하지 못할 정도의 연배이긴 하지만 한국 축구 100년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다.

▲일본과의 경기 종료 직전에 찾아온 마지막 찬스

먼저 일본 축구가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던 경위를 돌이켜 보면 이렇다.

멕시코올림픽 축구에 출전할 아시아 국가 한 팀을 결정하는 지역 예선은 올림픽 한 해전인 1967년 10월1일부터 10일까지 일본의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벌어졌다

참가국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 레바논, 필리핀, 베트남 등 5개국.

첫날 개막전에서 일본은 필리핀을 맞아 다음 해 올림픽 본선에서 득점왕(7골)에 오른 스트라이커 가마모도의 해트트릭을 포함한 가공할 공격력을 과시하며 무려 15-0의 압승을 거둔다. 반면 한국은 레바논에 4-1 승리.

이어 2차전에서 일본은 레바논을 2-0으로, 한국은 베트남을 3-0으로 제압해 각각 2연승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때까지의 득실은 한국이 득점 7에 실점 1로 +6, 일본은 득점 17에 실점 0으로 +17이 돼 한국은 절대 불리한 상황을 맞았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10월7일, 3차전에서 맞대결을 벌인다.

1954년 3월7일, 스위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도쿄. 5-1승)을 시작으로 2년 전인 2011년 8월10일, 삿포로에서 가진 A매치(0-3으로 완패. 삿포로 참사라는 명칭과 함께 조광래 감독 퇴진의 명분이 됨)까지의 75차례 한-일전 가운데 최고의 명승부로 일컬어지는 그날 경기내용을 간략히 되돌아보자.

한국의 베스트 11은 골키퍼 오인복(전 대한축구협회 이사)을 비롯해 수비라인에 서윤찬, 김호(1994년 미국월드컵 대표팀 감독), 김정남(1986년 멕시코월드컵 대표팀 감독), 조정수(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가 기용됐고 미드필드 진영에는 김기복과 홍인웅, 그리고 공격에 이회택(1990년 로마월드컵 대표팀 감독), 허윤정, 정병탁, 주민한이 포진하는 전형적인 4-2-4 라인이었다.

이에 맞서는 일본은 골키퍼에 요코야마(1992년 일본대표 감독), 수비진에 모리(1986년 멕시코월드컵 최종예선 한ㆍ일전 일본 감독), 오기, 미야모도, 하마자키, 미드필더에 야에카지, 유구치, 스기야마, 구와하라, 그리고 최전방 공격에 가마모도와 와타나베가 '투톱'으로 포진한 4-4-2 시스템.

도쿄만(灣)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머금은 안개비가 뿌리는 가운데 저녁 7시부터 시작된 한-일전의 초반 주도권은 일본이 잡았다. 경기 내용대로 한국은 투톱 와타나베(23분)와 가마모도(36분)에게 한 골씩을 뺐겨 0-2로 뒤진 채 전반을 마쳤다.

후반 들어 필사의 반격을 펼친 끝에 12분에 허윤정의 헤딩슛, 20분에 이회택의 하프발리슛으로 승부의 균형을 잡은 한국은 30분이 지날 무렵, 다시 가마모도에게 35m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뺐겨 패색이 짙었으나 종료 5분을 남기고 레프트윙 정병탁(1990년대 연세대 감독)의 극적인 문전 슛으로 다시 동점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에 득실점차에서 크게 뒤져 있는 한국으로선 반드시 일본을 이겨야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 아닌가.

버마(현재의 미얀마) 주심 우 틴 후트가 경기 종료 선언을 위해 휘슬을 입에 물려고 하는 순간, 한국에 마지막 찬스가 왔다.

▲크로스바 한 가운데 선명히 남아 있는 볼 자국

하프라인 부근에서 스기야마의 볼을 가로챈 이 글의 주인공 서윤찬이 즉각 센터서클 부근에 있던 김기복(실업축구연맹 부회장, 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 대전 시티즌 감독 역임)에게 연결하자 김기복은 일본 수비수 모리와 오기의 육탄 태클을 잇따라 제치고 25m 가량을 번개처럼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 일본 골키퍼 요코야마와 '외통수'로 맞서는 천재일우의 득점기회를 맞는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한국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김기복이 오른발로 날린 회심의 슈팅은 요코야마의 키를 넘어 약간의 포물선을 그리며 20m 가량을 날아 일본의 골 네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지만 결국에는 크로스바의 한 가운데를 맞고 떨어져 요코야마 쪽으로 떨어졌고 당황한 요코야마는 이를 발로 걷어내 코너킥이 돼 버렸으니.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 '그 때 그 볼'이란 바로 김기복의 이 슈팅을 말했던 것.

정병탁이 황급히 코너킥을 차 문전으로 올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주심이 휘슬을 불어 경기종료를 선언해 3-3으로 경기가 끝났다.

서윤찬의 회고.

"다음날 아침 회복 훈련을 위해 경기장에 나가 보니 어제 저녁 김기복의 슈팅 자국이 크로스바 한가운데 인주로 도장을 찍은 듯이 선명히 남아 있더군요. 46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그때의 아쉬움은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제 남은 경기는 마지막 날인 10월10일의 한국-필리핀, 일본-베트남전.

득실점차에서 일본에 무려 11점(한국 +6, 일본 +17)이 뒤져 있는 한국으로선 필리핀을 최대 점수차로 이기고 일본이 베트남에 지거나 비기는 상황을 기대하는 방법 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경기결과는 한국이 필리핀을 7-0으로 이기고 일본은 베트남에 1-0 승리.

똑같은 3승 1무지만 한국은 득점 17에 실점 4로 +13, 일본은 득점 21에 실점은 3으로 +18을 기록하게 돼 일본에게 멕시코올림픽 티켓이 돌아갔던 것이다.

물론 7일의 한-일전에서 김기복의 '마지막 슈팅'이 네트에 꽂혀 한국이 4-3으로 이겼다면 득실을 따질 것 없이 한국은 4전 전승, 일본은 3승1패가 돼 한국이 멕시코올림픽에 출전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

공-수 양면에 걸쳐 일본 보다 한 수 위에 있는 것으로 평가 받았던 한국이 멕시코올림픽에 나갔다면 일본이 획득한 동메달 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자꾸 하게 돼 서윤찬의 말마따나 세월이 흐를수록 아쉬움은 더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세계축구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다"는 서윤찬의 말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한(恨) 많았던 6.25 피난 시절

서윤찬은 1941년 12월6일생, 고향은 경남 창녕이다

"제가 창녕국민학교를 다녔는데요. 4학년 때 6.25가 났습니다. 부산까지는 피난을 못 가고 부산에서 가까운 밀양으로 피난을 갔는데 거기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가장이 안 계시니 가세(家勢)가 기울 수밖에요. 양철 지붕이 초가지붕으로 바뀌고 그나마 폭격에 날아가 일가족이 동네 교회에서 생활을 했는데요. 그 힘겨운 교회 생활이 6.25가 끝나고 제가 창녕중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교회 앞 공터에서 헝겊 쪼가리를 뭉친 둥글 넙적한 무슨 덩어리 같은 것으로 공을 삼아 친구들과 찬 것이 훗날 한국축구 명 수비수의 계보를 선도하는 스타플레이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그때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라고는 부산의 부산상고와 동래고 두개 뿐이었는데요. 안종수 선생님(안기헌 전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 부친)이라는 분이 이 두 학교 축구팀을 함께 지도하고 계셨는데 저는 부산상고로 입학을 하게 됐습니다."

한데 당시는 부산상고 축구팀이 확고한 기틀이 잡혀 있지 않을 때여서 서윤찬은 학교 대표 마라톤 선수로도 선발돼 '경남 도민체육대회' 단축마라톤에서 3위에 입상하는 이색적인 활약을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위에서 말한 안종수 감독은 동래고로 이적하고 부산상고 축구팀의 감독은 장상원을 거쳐 다시 김지균으로 교체가 돼 있었다고 한다.

서윤찬이 부산상고 3년 동안 올린 가장 좋은 성적은 1963년 제44회 전국체전(대구) 우승. 포지션이 수비수이다 보니 득점을 올리는 등의 가시적인 기록을 내지는 못했지만 팀이 우승하는데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제가 부산상고를 졸업할 무렵인 1964년 1월에 마침 금성방직 축구팀이 창단되더군요. 운 좋게 창단멤버로 입단을 했지요. 한데 이 금성방직의 창단 돌풍은 이듬해까지 이어져서 2년 동안 전국대회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

1966년 들어 제일모직으로 이적해 수비수로 꾸준한 활약을 하고 있던 서윤찬의 축구인생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온다. 그 해 12월에 창단한 양지 팀으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양지 팀에서 활약하며 대표선수로도 활약

언젠가도 본란에서 한번 설명한 바 있지만 양지 팀의 탄생은 남북의 대치상황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다.

다름 아니라 1966년 7월,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월드컵 축구에서 북한이 '아시아의 진주'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던 스트라이커 박두익의 활약을 앞세워 세계적인 축구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키며 예선을 통과해 8강까지 진출하는 것을 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북한을 이길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이 양지 팀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박 대통령의 '엄명'을 받은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서윤찬의 소속팀인 제일모직을 비롯해 해병대와 육군, 공군, 그리고 실업팀 대한중석과 석탄공사 등에서 활약하던 A급 선수들을 모조리 차출해 '중앙정보부 축구팀'을 만들었다.

양지라는 이름은 바로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추구한다'는 중정의 '업무 신조'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멤버는 골키퍼 이세연(1990년 로마월드컵 대표팀 코치)을 비롯해 수비에 서윤찬, 김호, 김정남, 조정수, 미드필더에 임국찬, 김기복, 김삼락 공격에 이회택, 정강지, 허윤정, 정병탁, 이이우 등이 발탁됐고 감독은 1950년대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날렸던 최정민(1977년 한국대표팀 감독ㆍ작고)이 맡았다.

"저희들에 대한 대우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당시 서울 이문동에 있던 중정 청사에 숙소가 있었는데요. 그 안에 잔디연습장이 있는 것은 물론 고기나 생선처럼 그때 웬만한 사람들은 먹기 어려운 고급음식들을 싫증이 나도록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양지 팀에 소속돼 있던 기간을 군복무로 인정해 줘서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양지 소속으로 활약하면서 병역의무를 완수하는 혜택을 누리기도 했지요. "

봉급 역시 높을 수 밖에 없어 당시의 고위 공무원 수준인 2만5,000원.

그 때 서울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서대문-동대문 간의 전차 요금이 3원이던 시절의 얘기다.

또 양지 팀에 소속하고 있으면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당연시되던 터여서 서윤찬을 비롯한 대부분의 양지 선수들은 창단 이듬해인 1967년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물론 서윤찬과 이회택 등 몇몇 선수들은 그 전 해인 66년에 이미 대표선수가 돼 있었는데 그 해 12월에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예선 탈락하는 시련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 양지 선수들로 주축을 이룬 한국대표팀은 1967년 8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벌어진 메르데카배 대회에서 버마(미얀마의 당시 명칭)와 전-후반 및 연장전을 통틀어 120분간의 대접전을 벌인 끝에 득점 없이 비겨 공동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아시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전력이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105일간의 해외원정

이처럼 대표팀의 전력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맞이한 대회가 바로 서두에서 설명한 멕시코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이었다.

하지만 경위야 어찌됐든 올림픽 출전권은 일본이 따내지 않았던가.

실의를 딛고 일어난 대표팀은 꾸준히 훈련을 거듭한 끝에 이듬해인 1968년 11월, 태국의 킹스컵 대회에서 우승해 아시아 최강을 재확인했는데 서윤찬은 그 때 대표팀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대표팀의 김용식 감독으로부터 통솔력이 있는데다 융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18명 대표선수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중책을 맡았던 것이다.

1969년 5월부터는 주장 서윤찬을 비롯한 모든 대표선수들이 지금껏 잊지 못하고 소중한 기록이자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커다란 '역사(役事)'가 시작된다. 105일 간에 걸친 '초(超) 장기 해외 실전 전지훈련.'

"그 해 10월 서울에서 멕시코월드컵(1970년) 15-A조 예선이 열리게 돼 있었거든요. 한국과 일본, 호주 3개국이 더블리그로 승자를 겨루는 방식이었는데 박 대통령께서 한국이 일본과 호주를 이기기 위해서는 외국선수들과의 실전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장덕진 당시 대한축구협회장님의 건의를 받아들이셔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105일간의 외국전지훈련은 축구를 비롯한 전 종목을 망라해 한국스포츠 100년 역사상 가장 긴 전지훈련으로 남아 있다.

인도를 시작으로 방글라데시-이란-이라크-이스라엘-그리스-스위스-오스트리아-프랑스-독일 등 10개국을 도는 총 2만km의 대장정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치른 26경기 중 18승2무6패의 좋은 성적을 안고 8월 초 귀국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종종 기억나는 추銓타??하나 있습니다. 그때 저희를 인솔하신 대표팀 단장님이 중정 간부인 원스타(준장) 출신의 김승용 장군이셨는데요."

서윤찬의 이 말에 필자가 사족을 달자면 김승용은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의 측근으로 양지 팀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잘 아시겠지만 유럽국가에서는 국경 개념이 별로 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버스로 이동하지 않습니까. 한데 김 단장님이 지루하니까 노래를 하자면서 절더러 자꾸 노래를 시키시는 거에요. 저는 노래를 할 줄 모르는데. 하는 수 없이 그때 유행하던 진로소주 광고송을 불었지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 하는 거 말입니다. 그거 몇 번 부르고 나니까 제 별명이 차차차가 돼버렸지 뭡니까."

▲1970년 축구선수로서의 전성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된 105일간의 세계일주 훈련을 하고 왔건만 앞서 말한 멕시코월드컵 15-A조 예선에서 한국은 호주에게 우승을 내주게 된다.

그때 호주와의 2차 리그 마지막 경기 1-1 상황에서 후반 5분을 남기고 이회택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임국찬(미국 거주)의 실축으로 허공에 날려버리는 모습은 서두에서 설명한 1967년 10월7일, 멕시코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 한-일전서의 김기복의 '그 때 그 슈팅'에 버금가는 아쉬움이다.

비록 멕시코월드컵 티켓은 놓쳤지만 그 해 12월 방콕에서 열린 제2회 킹스컵 대회에서 서윤찬이 수비의 주축을 이룬 한국은 인도네시아와의 결승전에서 1-0으로 승리해 전년에 이어 2연패를 달성한다.

이듬해인 70년에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없었지만 한국 대표팀은 7월의 메르데카 대회와 11월의 킹스컵, 그리고 12월의 방콕아시안게임 우승 등 3개 대회 제패라는 한국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겼다.

3개 대회 모두 수비라인의 핵심에 서윤찬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하지만 그 해 12월의 방콕 아시안게임이 서윤찬에게는 대표선수로서의 마지막 대회가 되고 말았다.

1971년 5월2일 개막될 제1회 박대통령컵(박스컵) 국제축구대회 출전을 앞두고 갑작스런 심장질환이 생겨 더 이상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빌 수가 없게 된 것.

"박스컵을 앞두고 훈련을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파서 정밀조사를 받아보니까 의사가 심방이 뭐 어떻게 됐다나 그러더군요. 더 이상 뛰면 안 된다고도 하고요. 어떡합니까, 대표팀에서 나오는 수 밖에요."

▲택시기사, 김밥집, 칼국수집 거쳐 건축업으로 활발한 여생

그런가 하면 서윤찬이 소속해 있던 양지 팀은 창단의 주역인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1970년 초에 해임돼 이후락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흐지부지 해체된다.

대표팀에서 사퇴한 서윤찬에게는 '갈 곳'이 없어진 셈인데 다행히도 1971년 신탁은행의 선수 겸 코치로 발탁돼 72년까지 활약하다가 선수로는 은퇴를 하고 74년까지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했다..

"1975년 부산에 있는 동아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는데요. 그 해 고교대회로는 가장 큰 대통령금배대회에서 우승하는데 힘을 보탠 기억이 나는군요. 이후로는 동아대 감독과 금호산업 감독으로 있다가 다시 동아고로 돌아와 91년까지 후진들을 양성했습니다."

이 때가 서윤찬의 나이 50.

"나이를 먹으니까 감독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더라고요. 나와야 되겠습디다. 하지만 공 차면서 모아둔 돈도 별로 없고 해서 서울로 올라와서 택시운전도 해보고, 또 옛날 양지 팀에 있을 때 선수들을 뒷바라지 해주시던 김영진 대령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구기동에서 1년 동안 칼국수 집도 해보고요. 또 방배동으로 이사를 와서 김밥집을 한 1년 반인가 했는데 김밥 뭉치는 거 그거 보통일 아니더군요.

2000년대 이후부터는 부산 동아고 감독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친지의 건설회사를 어렵게 인수해 운영을 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부동산 경기의 침체 속에서도 소형 건물의 건축과 분양은 그런대로 숨통이 트여 '생계'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막을 내릴 시간. 70을 넘은 '중(中) 고령'에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제가 실버축구단인 로얄 FC 회원이거든요. 매주 토요일 효창운동장에 나가서 공을 차는데요. 건강 유지하는 데는 그만입니다.?

그라운드에서 프리킥을 차는 걸 보니 '라인드라이브 성'으로 한 30m는 날아가는 것 같았다.

서윤찬 약력

▲생년월일 : 1941년 12월6일 ▲출신교 : 창녕국-창녕중-부산상고-동아대 ▲축구시작 : 부산상고 2년 ▲소속팀 : 부산상고-금성방직-제일모직-양지-신탁은행 ▲지도자 생활 : 동아고-동아대-금호산업-동아고(1991년) ▲주요전적 : 1963년 제44회 전국체전 우승. 67년 메르데카배 축구대회 우승, 킹스컵 축구대회 3연패(1968~70년).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 1970년 아시아올스타 선발 ▲가족사항 : 1970년 11월 결혼한 부인 김영자(69)씨와의 사이에 2녀 ▲축구 외 즐기는 운동 : 테니스 배구 마라톤 탁구 ▲좋아하는 음식 : 김치찌개, 된장찌개

김석현 선임기자 kimminor@naver.com

[ⓒ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